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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선택해.

by 보라보라


얼마 전 이사 갈 집의 리모델링 업체와 계약을 했고 어제는 리모델링 세부 자재들을 선택하고 왔다.


미팅 전 담당자님이 미리 겁을 줬었다.

"제가 자재 선택할 때 빨리 끝낸 케이스가 2시간 걸린 거였어요. 저녁 드시고 오셔야 더 잘 결정하실 거예요.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날 충분히 고민하실 시간 드릴게요."


착실한? 우리 부부는 퇴근 후 햄버거로 저녁식사를 마무리하고 업체를 방문했다.

그날 우리는 담당자님이 말한 빨리 끝난 케이스처럼 딱 2시간 만에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자재 선택이 뭐 오래 걸릴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선택할게 많았고, 샘플만 보면 더 오래 걸렸을 수도 있는데 그나마 3D 화면으로 샘플을 적용한 모습까지 구현해 줘서 그 시간 안에 끝내고 나온 것 같다.


우리 부부 둘 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 이제 타일만 고르면 된다. 수고했어."라고 서로를 다독인 후 아무 말 없이 지쳐서 돌아왔다.



SE-fb44828a-9e6c-4442-978c-ea456d5627e1.jpg © Free-Photos, 출처 Pixabay


둘 다 말이 없는 길을 걷는 동안 난 제대로 자재를 선택한 건지.. 걱정하면서 그때 나눴던 우리 부부의 대화를 되돌아봤다.




문 손잡이를 선택할 때

자신의 선택을 먼저 이야기하는 치즈군 " 자기야, 이건 기존 집 손잡인데 이제 이런 메탈 느낌 어때? "

내 대답 "괜찮은데, 나는 이것도 괜찮은데? 방문 손잡이가 무거울 필요는 없지."

바로 수긍하는 치즈군 "하긴.. 그럼 이건 어때? 이거랑 저것 중.. 자기가 선택해."

그럼 나는 아무 말 없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대답한다. "그럼 자기는 이게 더 끌린다는 거지? 이걸로 할게요."


중문 디자인을 선택할 때

치즈군이 먼저 제시해 준다.

"자기가 봐봐. 중문은 자기가 제일 신경 쓰는 곳이잖아. 1번 3번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그냥 디자인일 뿐 뭐가 괜찮을지 잘 모르겠다. "이건 도면으로 구현해 볼 수 있나요?"

담당자님이 흔쾌히 대답해 줬다. "네 가능하죠. 이건 1번 디자인 적용했을 때 이건 2번,.. 5번까지예요."

치즈군이 미리 선택한다.

"1번이나 3번이 괜찮아 보이네. 자기가 선택해. 우리 집은 딱 들어왔을 때 개방감을 원하잖아."

확실히 화면에 적용된 디자인이 결정하기 편했다. 그리고 결정한 나.

"3번이 맘에 드는데 3번만 다시 보여주세요. 아.. 3번으로 할게요."


담당자님 "문 열리는 방향을 선택해 주세요."

치즈군 "근데 혹시 긴급상황 때를 생각해서 안에서 미는 방향이 좋은 거 아닌가요?"

담당자님 "글쎄요. 그건 전 처음 듣는데.."

나 "저는 중문을 열었을 때 걸리 적 거리지 않게 안에서 당기는 방향이 좋을 것 같아요. 보통 들어갈 때 미는 게 편했고, 지금 이쪽 벽은 그냥 벽으로 쓸 거라 안전할 것 같네요."

치즈군 "그런가, 자기가 결정한 대로 해."


그 외 샷시, 벽지, 마루, 조명, 필름, 붙박이장, 콘센트 디자인 등 세부적인 것들을 선택하면서 서로 선호하는 것을 주장하기보다 전반적으로 어울리는지, 우리 부부가 원하는 집 분위기에서 튀는 건 아닌지 등등 의견 조율이 잘 되었다.




운 좋게도 담당자님이 1-10까지 다 보여주고 선택하라는 게 아니고, 이런 스타일 저런 스타일로 크게 구분하여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콘셉트에 맞게 3-4가지 후보를 제시해 주셨다. 그러면 치즈군이 그 후보 안에서 2개를 선택했고, 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방법이었다.


사실 치즈군이 색감이나 디자인적 요소를 보는 미술 쪽 감각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그가 고른 선택지 안에서 내 취향까지 더해 빨리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왜 자꾸 나보고 결정하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선택하다 보니 내가 더 편하게 선택하도록 그가 유도했던 것이다.


그날 밤에 내 귀에서 계속 메아리처럼 들리는 말이 있었다.

치즈군이 2시간 동안 매번 했던 말."자기가 선택해. 자기가 결정한 대로 해."


나보다 먼저 잠든 치즈군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고마워. 당신의 배려 덕분에 내가 더 많은 결정권을 갖게 됐어.'


이렇게 고른 자재들이 정말 우리 부부가 원하는 콘셉트대로 잘 완성될까 궁금하다.

photo-1522708323590-d24dbb6b0267.jpg?type=w1 © deborah_cortelazzi,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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