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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Apr 12. 2021

국밥.

비오는 날, 뭐 먹지?


요즘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확인하는 일은 창문 넘어 일출을 감상하는 것이다.

동향집의 가장 큰 장점이 일출 일몰을 집안에서 다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출을 확인하다 보면 구름 잔뜩 낀 날들이 있다.

해가 나 여기 있다고 몸을 드러내고 싶어도 심술 맞은 구름이 다 막아버려서 실루엣도 아주 어렴풋이 구름 그림자보다 더 희미하게 보여주는 날.

이런 날은 거의 비가 온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덕분에 얇아진 옷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게 된다.

뜻밖의 가라앉은 기온 탓에 몸이 차가워지는 것이다.


이럴 때 예전 같으면 따뜻한 커피나 차가 생각났고, 퇴근 이후 저녁 식사는 당연히 막걸리에 파전이라 하며 친구와 날씨 핑계로 약속을 잡곤 했었다.

또는 퇴근길 동생과 부모님을 꼬셔서 저녁 메뉴로 다 같이 막걸리&두부김치 또는 수제비 또는 바지락 칼국수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날 떠오르는 메뉴가 바뀌었다.

그건 바로 국밥이다.


추우니깐 따뜻한 국밥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동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 물에 빠진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입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 수육도 족발도 안 좋아하냐 묻는다.

그건 아니다.


내가 식사 자리에서 마주한 고기가 물에 빠져 있다면 이미 그릇에 구조되어 올라온 고기를 먹는 것보다 덜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역국 소고기 뭇국 매운탕 이런 요리를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물에 빠진 고기가 진이 다 빠졌을 것 같아서 그 녀석을 내가 꼭 먹어야 하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


또, 평소 나는 국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백반을 먹을 때 밥과 함께 국이 나오니깐 국을 간간이 먹는 거지 한 그릇을 받으면 국의 3분의 1 정도만 겨우 먹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국에 든 고기는 더 호감이 덜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내가 국밥이 먹고 싶다니, 그것도 콩나물국밥보다 수육 국밥이 먹고 싶다는 거다.


급하게 데워서 뜨거운 게 아닌 오랫동안 은근하게 데운 뜨끈한 국이 담긴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수육이 풍덩 빠져 있고, 녹색의 부추를 넣고 내가 좋아하는 들깨가루를 두 스푼 가득 넣어 국물의 흰색이 안 보이게 한다.

그리고 먼저 국에 빠져있는 녀석들을 한 점과 겉절이 김치와 한입씩 먹다가 중간에 식혀둔 밥을 퐁당 빠트려 먹는 것이다.


그럼 차가웠던 내 몸의 온도가 어느 순간 따뜻해지면서 나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면 하루 내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다.

얼른 퇴근해서 먹고 싶다 생각했다.


오후에 한참 비 오는 밖의 풍경을 감상하다 조용히 치즈군에게 말했다.

"비가 계속 온다면 오늘 퇴근 후 저녁 메뉴는 국밥이야."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치즈군이 웃는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서 심각한 문제나 중요한 말을 하려나 했더니 국밥 먹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 거야?"

"응, 내가 비 오는 날 국밥 먹고 싶다고 말한 거 거의 처음 아냐? 나한테는 중요한 변화인데.. 그리고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일이잖아. 오늘 저녁에 뭐 먹지?!"


옆에서 듣던 동생이 한마디 거든다.

"우리 언니 늙었네~ 늙었어. 막걸리 찾던 사람이 국밥이라니~."


동생의 한마디에 내 과거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게. 이럴 때 나는 달달한 막걸리를 찾았지.. 국밥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른 입맛이 되어가는 건가. 아님, 세월 탓인가.


물에 빠진 고기를 안 좋아하는 내가 비 오는 날 찾는 요리가 국밥이 될 줄이야.

오늘은 들깨가루가 없었다. 그래도 꿀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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