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습작

필리핀에 갈걸 그랬다.

by 채리

개인적으로 책 펴놓고 오래 앉아있어야 공부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호주 어학원은 정 반대였다. 9시에 시작해 2시면 모든게 끝났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에 4시간밖에 공부를 안했다. 그 4시간 중 액티비티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주제 던져 주고 학생끼리 토론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선생님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짜증 났다. 정말 개같이 일해 일주일에 300달러 씩이나 하는 학원비를 냈는데 배우는 것은 교회나 도서관에서 하는 무료 클래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가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우리 집은 엄마부터 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 공장에서 일 할 때는 주말에 인터넷을 찾아가며 일주일치 음식을 한 번에 요리해 맛은 없어도 나를 배불리 만들어 주는 음식을 도시락이라고 들고 다녔다. 심지어 공장 사람들도 나에게 살기 위해 먹는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학생들 사이에 있으니 머슴밥을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학원이 끝나고 나서도 문제였다. 할게 없다. 이럴줄 미리 알았으면 고민하지도 않고 필리핀에 갔을 것이다. 학원의 다른 학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시에 학원이 끝나면 집에 가기 싫은 친구들끼리 모여 학원 문을 닫을때 까지 탁구를 치는게 우리가 할수있는 전부였다. 모두들 탁구를 치고 싶어 5시까지 학원에 남아있던게 아니다.

여행을 하면서 가끔 탁구를 칠 기회가 오는데 다들 나에게 어디서 탁구를 배웠냐고 물어보면 난 호주에 있을때 영어학원에서 배웠다고 대답한다.


6월이면 호주의 겨울이다. 춥지 않지만 누사가 관광지이다 보니 관광객도 적고 학생도 여름에 비해 적었다. 다행히 하우스메이트는 많아 집은 항상 북적거렸다. 내 룸메이트는 칠레에서 온 크리스라는 친구였다. 처음에는 날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친구와 같이 살다가 여자친구랑 싸운 후 홧김에 여자친구가 방을 나갔는데 그 사이에 내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이상 나도 한방을 쓰는게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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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항상 Bro! Bro! 거리며 밝기만 한 프랑스인 메튜가 눈치 없이 다 같이 서핑을 하러 바다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난 살면서 서핑이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불편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메튜는 크리스가 칠레에서 프로 서퍼였다고 나에게 서핑을 가르쳐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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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같이 서핑을 하러 갔다. 크리스는 그리 친절히 서핑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바다 옆에서 살며 자연스럽게 서핑을 배워 내가 왜 24살이나 되도록 서핑을 한 번도 안 해봤나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냥 서핑 보드를 빌려주며 해안가는 파도가 부서져 균형 잡기 힘들고 사람도 많으니 저 멀리 떨어저서 서핑하란다. 프로였다 하니 무조건 믿었다. 크리스는 모래 위에 서서 계속 "더 멀리, 더 멀리"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게 멀어진 순간 "지금이야! 일어서!"라고 외쳤고 나는 그 명령을 따랐다. 서핑이 처음이니 당연히 균형을 못 잡고 바로 바다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말했듯 나는 수영을 하지 못했다. 서핑을 하려면 수영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냥 크리스와 메튜만 믿고 따라간것 뿐이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크리스는 내가 장난치는 줄 알았고 메튜는 내가 정말 물에 빠진걸 알았단다. 그런데 수영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에 빠트려 놓는거라고 생각해 구해주지 않았단다. 이렇게 죽기는에는 그간 일한게 아까웠다. 다행이 크리스가 바다로 들어와 나를 해변까지 끌고 나왔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당연히 수영을 할 줄 알 거라고 생각했단다. 사람들이 누사로 가는 주 이유중 하나는 서핑이다. 학원 수업 중에도 서핑이 있을 정도로 서핑하기 좋은 곳이란다. 그런데 내겐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서핑이었다.

죽을뻔했지만 덕분에 크리스와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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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크리스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자기가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술상을 차려 오라고 계속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크리스 아니었으면 죽을뻔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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