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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리 Oct 03. 2019

8년 차 대학생

일기장을 가장한

나는 대학교를 8년 다녔다. 이렇게만 말하면 나를 모르는 사람은 내가 약대나 의대에 다녔을 거라 생각한다. 당연히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난 재수를 했다. 재수를 끝마치고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내게는 목표가 하나 있었다. '조.기.졸.업'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조기졸업을 위해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를 오래 다녔지만 고인물이나 화석과 같이 복학생을 낮춰 부르는 표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낮춰 부르지 못했다. 나이가 많다고 놀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적당히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장난일 수 있지만, 정말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학과 조교도 나보다 학번이 낮을 정도였으니깐.



8년을 돌이켜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언가를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많은걸 경험했다. 학교에서 가르친 게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배우기를 거부했다. 나만의 (개똥)철학 같은 것이었다. '졸업하면 죽을 때까지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할 테니 학교에 다니면서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해보자!'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중국까지 갔을 정도였다. 


분명 많은걸 경험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떠올려 보니 온통 술을 마신 기억뿐이다. 1학년 때는 신입생이라고 술을 많이 마셨고, 2학년 때는 군대에 가기 전이라고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3학년 때는 오랜만에 복학을 했다고 술을 마셨고, 4학년 때는 이제 곧 졸업을 한다고 술을 많이 마셨다.

나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지만 나와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마실 친구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새로 술친구를 사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낯선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과 낯선 사람과의 침묵이 싫어 아무런 말이나 하는 사람. 난 후자다. 그 낯섦을 채우기 위해 계속 떠들었다. 그게 내겐 머릿속에서 파편적으로 떠돌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2학년 때 습관적으로 떠들던 전역 후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워킹홀리데이와 세계여행으로 이어졌다. 4학년 때 습관적으로 떠들던 졸업 후 하나의 직장에 속하지 않고 매일 같이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의 백수생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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