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설 Jan 31. 2021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을 기억하며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학살로 인해,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로힝야족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그들의 땅을 떠났다. 수많은 로힝야족 사람들이 미얀마에서 도륙당하고 있다. 인류평화에 공헌한 이에게 수상되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수치 여사는 “우리는 미얀마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이며, 모든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와 ‘모든 이’에 로힝야족이 설 자리는 없다.

미얀마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우러진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미얀마 연방 공화국이며, 미얀마 즉 버마족이 인구의 과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불교도가 약 90%에 달한다. 미얀마에서 ‘우리’와 ‘모든 이’란 결국 ‘불교를 믿는 버마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인 것이다. 로힝야족에 대한 잔혹하고 광기 어린 폭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얀마에 로힝야족은 이방인이다. 아니 절멸해야 할 적이다. 로힝야족은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내몰리거나, 숨이 끊어져 땅에 묻히거나, 떠난 이와 죽은 이를 대신해 원한과 함께 무기를 쥐었다. 철저한 폭력 앞에 처절한 생존만이 뒤따를 뿐이었다.

미얀마는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정당화한다. 로힝야족 집단학살과 수치 여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일축한다. 미얀마의 실질적 정치지도자이자 지배자인 수치는 정치적 모호성으로 로힝야족 집단학살 문제를 면피하고 있다. 미얀마는 로힝야족이 영국의 식민통치기에 영국의 하수인으로서 미얀마 인들을 박해하고 억압하였기에 로힝야족에 대한 폭력이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또한 국제사회는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는 내정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여 개입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엄포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화가 아닌 합리화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주의의 현신인 수치는 왜 침묵하는가?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빛을 발해야 할 사안이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학살이 아닐까? 그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수치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대상에는 로힝야족이 포함되지 않아서이다. 또한 수치와 그의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집권층이 재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미얀마 인들의 지지를 위하여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좌시하고 묵시하는 것이다.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통치기와 오랜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 아웅산 수치의 영향 하에 비로소 민주국가로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 또는 정치권력 생명의 연장을 이유로 국가라는 집단 하에 특정한 소수 집단을 적대 집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고 있다. 적대 집단으로 상정된 로힝야족을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의 결집을 통해 통합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식민통치와 군부독재의 부당함을 몸소 겪은 이들이 힘써 일군 민주국가는 부당해지고 있다. 그들이 혼란을 끝내고 통합을 위해, 그들의 지도자와 지도세력이 정치생명의 연장을 위해 로힝야족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얀마의 주장과 논리는 그 힘이 미약하다. 우선 로힝야족이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방글라데시에서 데려온 이주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영국이 데려온 방글라데시 이주민과 로힝야족은 다른 이들이며, 이주민들과 미얀마의 대립에 같은 이슬람인 로힝야족이 휘말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힝야족이 영국의 식민통치기 이전부터 아르칸에서 거주해온 이들이라면 미얀마의 총구는 잘못 겨눠진 것이다.

이를 차치하더라도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를 뿐이다. 증오의 연쇄는 폭력을 양산하고 결국 공멸로 치닫는다.

국제사회는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야 하며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 국가가 국가로서의 정당성이 없거나 이를 상실할 경우에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국가권력의 국민에 대한 폭력 사태이다.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청소 및 집단학살이 이와 유사하다. 물론 미얀마는 로힝야족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국민이 아닌 한 민족에 대한 폭력은 과연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국가의 주요 4대 범죄에 속하며, 이는 개입의 조건을 충족한다.

또한 다수의 난민이 발생함으로써 미얀마에 인접한 주변국들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미얀마 내 로힝야 반군과 미얀마 정부군의 갈등과 대립은 내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안보 불안 요소가 되어 확전의 도화선이 될 우려가 있다. 미얀마의 로힝야족에 대한 집단학살이 안보 딜레마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난민에 대해 미얀마에 항의하고 있으나 미얀마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은 미얀마의 집단학살 행위를 맹비난한다. 중국과 인도는 이해에 따라 미얀마를 지지한다. 시리아에서 내몰린 IS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을 이용하려고 한다. (힘은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다.)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학살은 결국 군부독재를 벗어난 과도기적 민주국가인 미얀마가 정치적 혼란을 종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관심 전환을 유도한 것이며, 미얀마의 집권층이 권력 연장을 위해 특정 집단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당한 것이 아닌 자기기만의 자가당착적인 합리화에 불과하다. 민주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미얀마의 범죄행위에 국제사회는 침묵하지 않고 행동해야 한다.

누군가의 오열을 통해 자신의 우열을 가려야 하는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우위를 점하고자 타인을 낭떠러지로 떠밀어야 하는가? 타인의 살과 뼈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몸집을 키워야 하는가? 인간의 카니발리즘적 행위는 오늘날에도 그칠 줄 모른다. 자신의 우등함을 증명하고자 타인을 열등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그렇게 영락을 누리는 우를 범한다. 과연 인간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 존재인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 본성의 전부가 아니다. 한 실험에 따르면 영장류는 처한 환경에 따라 본성이 발휘 및 계발된다고 한다. 환경을 조성하는 것,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진보이다. 인간의 카니발리즘적 성향에서 벗어나 모두가 어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광기와 폭력을, 그 희생자들을. 히틀러는 폴라드인 학살을 감행하며 말했다. 그 누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죽음을 기억하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최초의 집단학살 사례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를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라. 잊지 마라. 분노하라. 변화하라.

 
17.11.11.

매거진의 이전글 술 좋아하시는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