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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Dec 15. 2020

<붉은 돼지>

영화 감상

 
붉은 돼지. 대개 소녀가 주인공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에서 돼지가 주인공으로서 포스터의 중심을 차지하였기에, 언젠가 기필코 이 작품을 봐 두겠다고 생각해왔다. 돼지. 그것도 하고 많은 돼지 중에 ‘붉은’ 돼지일까? 싶었는데 그건 단순하게 그가 붉은색 비행기를 몰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붉은색 비행기를 모는 돼지 포르코’의 이야기다.

 
포르코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공적으로부터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는 둥, 공적들을 소탕하는 둥. 살아간다. 그는 한때 왕국의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였고 참전도 하였다. 전투 중에 동료들을 잃고 그 역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되돌아온 후 그는 돼지가 되었고, 이름을 버리고 조국을 버리고 연인을 버리고 방랑자가 된다. 그는 인간에서 돼지가 됨으로서 자신을 버렸다. 그렇게 벗어나려 했다, 과거로부터.

그가 벗어나려 한 과거는 짐작하건대 ‘전쟁’이랴. 조국과 국민을 위해 참전하였으나, 매 전투를 거듭하며 그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동료들과 절친한 친우마저 잃고 사경을 헤맸을 때 비로소 그는 전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다. 전쟁은 야만과 광기만 있을 뿐 대의도 명분도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사위었고 스러졌다. 포르코와 더불어 운이 좋은 몇몇은 살아남는다.

포르코는 돌아가지 않는다. 사위고 스러지다 남은 것들에게로. 그들은 살아남은 슬픔을 나누었으므로 함께 뉘일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사위어 스러진 것들과 뉘었을지도 모를 테니깐. 전쟁에서 삶과 죽음을 나뉜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 테나 그가 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방랑하였다, 바람처럼. 그러나 그는 배회한다. 바람이 이는 곳으로.

포르코가 돼지가 된 것은 마법 때문이나 왜 자신에게 마법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그는 전쟁을 겪었고 무수한 폭력과 즐비한 죽음을 체험했다. 그는 도저히 인간일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전쟁에서 인간은 인간일 수 없었고 전후로도 인간은 인간으로 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돼지가 되었다. 바라는 것을 이루는 힘이 마법일 때, 돼지로의 변신은 무의식의 발로이며 바람이며 전쟁의 상흔인 것이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 사람으로 사느니 돼지로서의 삶을 바란 것은 아닐까? 적어도 배고픈 돼지는 굶주린 인간보다 나으므로.

그러나 포르코는 어중간한 돼지이다. 이족보행을 하며 사람처럼 생활한다. 과거의 인연도 채 정리하지 못했으며, 아드리아나 해에서 지나의 주변을 배회한다. 그리고 비행을 계속한다. 사람으로서 살 수 없는 바람은 이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답게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바람 또한 일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현재와 미래를 살기 위해 과거가 필요하다.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잊지 않고 바라마지 않은 것들이다.

포르코의 귀환은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완성된다. 포르코는 공적의 청탁을 받은 커티스에게 패해 전후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던 비행기를 잃고 만다. 옛 친구인 피콜로를 찾아가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며 피오라는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커티스와의 시합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다. 그는 여러 차례 커티스를 쏘아 승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쏘지 않고 주먹다짐으로 이긴다. 포르코는 전투기를 몰지만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인간됨이다.

비행기 경주에서 주먹다짐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사건들을 통해 그는 과거를 마주하고 삶을 되찾고 어중간한 돼지에서 어중간한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영화는 끝자락에서 지나의 호텔에 정박한 붉은 비행선을 보여주며 마친다. 전쟁의 슬픔과 인간으로서의 수치가 그를 돼지로 변신시켰다면, 삶에 열망과 인간으로서의 바람이 그를 사람들 곁에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는 방랑을, 긴 여행을,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가 포르코가 되어 방랑자를 자처할 때, 그의 나라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 아귀다툼을 하고 그 두 세력 모두 파시즘을 내세우며 정복 야욕을 불태운다. 나라에서는 현상금 사냥꾼들과 공적들까지도 군사로 쓰고자 한다. 포르코의 옛 친구인 소령은 포르코에게 공군으로 되돌아올 것을 권하지만 포르코는 거절한다. 그가 사랑하던 나라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거듭될지 모르고 포르코와 지나의 삶은 전쟁이란 풍랑에 재차 휘말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에서 바람이 일 테니, 인간적이고 유쾌한 어중간한 돼지 또는 인간인 포르코에게 삶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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