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울분>, 필립 로스

하루에 한 권 !(21일 프로젝트)

by 차티 Chati

2019.09.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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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1951년의 미국. 한국전쟁의 여파는 징집 대상의 젊은 세대와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부모 세대에게 견디기 힘든 불안과 공포를 안겨준다. 특히 유대인 출신의 정육점 주인인 마커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낮이나 밤이나 아들의 행적을 캐묻고 상식 밖의 비합리적인 태도로 아들의 삶을 통제한다. 영혼을 잠식하고 갉아먹는 불안으로 서서히 마커스의 가족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 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어머니의 걱정과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학에 들어간 마커스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아버지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동부의 리버럴 한 로버트 트리트 대학을 그만두고 집에서 떨어진 오하이오주의 와인스버그 대학에 편입한다. 집을 떠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와인스버그 대학의 보수적이고 엄격한 도덕적 관습에 부딪히며 점점 파국으로 내닫는다.

마커스가 사랑하는 올리비아는 다른 대학에서 퇴학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곳으로 편입했다. 의사 집안의 아름다운 외모의 올리비아. 그런데도 올리비아의 불안과 히스테리는 점점 커진다. 자신을 정상으로 만들어줄 것 같던 보수적인 와인스버그 대학은 그녀를 더욱더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만들고, 사람을 옥죄는 질서와 관습, 독선 속에서 서서히 미친 여자가 되어간다. 이것은 보수적인 정서가 팽배했던 1951년도의 일이다.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러,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차별과 독선, 보수성에 맞서서 기성세대에 반기의 깃발을 올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 소설의 배경은 1951년도이다.

마커스는 아버지를 피해서 달아나지만 아버지보다 더 큰 보수적인 사회와 맞닥뜨린다. 마커스가 와인스버그 대학 학과장과 만나서 면담하는 내용은 마커스를 울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는 기폭제가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이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룸메이트를 하고, 자신이 혼자 지내기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 삶에 개입할 수 없다. 학과장은 마커스가 룸메이트를 두 번 바꿨으며 어떤 클럽에도 가입하지 않고 유대인임에도 종교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삶을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도대체 혼자 지내기로 선택하고, 전쟁에 나가지 않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는 일이 왜 면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그는 말한다.

"왜 모든 사람이 그 정도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나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입증하려면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울분은 결국 폭발한다.

무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항변하면서 러셀의 말을 인용한다. "세상을 사는 데서 오는 공포에 노예처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라."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러셀의 말을 열렬히 지지한다. 하지만 학과장 앞에서 쏟아낸 그의 항변은 서로 다른 견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대화 끝에 마커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독선적이며 날 선 말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한번 커져버린 감정의 파고는 쉽게 멈출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다.


하지만 아직 19살이지 않은가. 19살에 삶을 통제하고 감정의 휩쓸림을 견디는 법을 어찌 알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놓는 꽉 막힌 사람 앞에서 평정을 얻는 방법은 어떤 걸까.


이 소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총에 맞아 죽은 마커스가 기억하는 자신의 19살이다. 늘 자신을 밀어붙이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던 마커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나 벗어나려고 했던 아버지의 불안이 자신을 사로잡은 사람의 이야기다. 불안은 불안을 낳고,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의 불안이 마커스에게도 따라다니고, 그의 삶을 성실함과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으로 내몬다.

"나는 아버지만큼이나 나빴다. 내가 바로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를 뉴저지에 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안에 나도 둘러싸이고, 불길한 예감에 나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하이오에서 나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불안은 전염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버지를 부정하다 아버지가 된 청년의 이야기인 셈이다. 불안을 부정하다 불안에 전염된 청년의 이야기다. 또한 아버지의 불안의 기원이 관습적인 세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더듬어가는 사회 소설이다.

"나 자신이 와인스버그 대학의 도덕적 관습에, 나아가 내 삶의 압제자인 독선에 말려들어 김 빠진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람을 옥죄는 그 독선이 올리비아를 미치게 만든 것이라고 얼마든지 결론을 내릴 용의가 있었다. 가족에게서 원인을 찾지 마세요, 엄마..... 관습적인 세상이 허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원인을 찾으세요! 나에게서 원인을 찾으세요. 가엾을 정도로 관습적인 인간으로 여기 왔기 때문에 여자애가 자기를 빨아주었다는 이유로 여자애를 신뢰하지도 못했잖아요."

비록 마커스는 죽었지만, 마커스는 계속 19살의 한 해를 더듬어갈 것이다. 도대체 그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버지의 불안을 늦출 방법은 없었던 걸까. 올리비아의 눈물과 히스테리에 걸린 비명과 맞설 힘이 있을까. 관습의 높은 벽 앞에서 어떻게 하면 숨 막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을 사는 데서 오는 공포에 노예처럼 짓눌리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고 곤경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을까.


마커스는 죽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세는 기억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기억이 전부인 곳이었다. ... 꿈이건 아니건 여기에는 지나간 삶밖에 생각할 것이 없다. 이것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천국으로 만드는 것일까? 망각보다 나은 것일까. 아니면 나쁜 것일까. ... 여기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문이 없다. 오늘과 내일도 없다. 방향은 뒤로만 간다. 심판은 끝이 없다."

어쩌면 마커스가 겪었던 문이 없고 심판만 끝이 없는 기억된 과거밖에 없는 그 반복되는 죽음의 세계가 곧 변하지 않는 현실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1951년의 미국, 그리고 또 어느 시공간에서도 계속 이런 울분은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발목을 붙잡는 일들은 수도 없이 반복된다. 1951년의 여성 인권과 비교해볼 때, 지금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올리비아가 있고, 또 수많은 마커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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