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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콩대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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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예랑 Mar 22. 2024

Blue magpie

08. 영상 10도. 맑고 쌀쌀하다.

  어느 노인이 내게 손짓을 했다. 노인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연신 무어라 말을 하며 손으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내가 통 반응이 없으니 급기야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을 하였다. "I'm sorry. I don't understand." 나는 노인에게 냉랭한 얼굴을 툭 던지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념주화를 뽑으려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냉담한 모습에도 개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무어라 말을 하였다. 나는 하려던 일을 멈추고 기어이 몸을 돌렸다. 그 얼굴은 맑은 염려와 천진한 웃음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백발의 노부부가 고향의 먼동처럼 순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다급한 손짓을 섞으며 내게 거듭 어떤 말을 하였다. 그 말뜻은 알 수 없으나, 손짓과 눈을 보아하니 분명 나를 도우려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손짓은 기념주화를 만드는 동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기계가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바로 오른편에 있는 Information을 가리켰다가 이내 조금 멀리 떨어진 왼편에 있는 Post office를 가리키고는 곧 내 앞에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념주화 기계 옆에는 버젓이 동전 교환기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천진한 얼굴은 신선神仙과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인의 굵은 손마디가 나에게 따라오라 손짓을 했다.

  노부부와 나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기념관 안을 나란히 걸었다. 하얀 대리석 위로 세 사람의 걸음이 비쳐 보였다. 간소하지만 정갈한 옷차림, 그것은 이들도 적어도 이 기념관에서는 이방인임을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도시에서 여행을 온 것일까. 이 거대한 기념관을 종일 돌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길이었을까. 신선과도 같은 노인의 얼굴이 연거푸 뒤를 돌아보며 천진하게 웃는다. Post office에 도착한 노인은 어느 빈 창구에 서서 큰 목소리로 직원을 불렀다. 그러자 한 직원이 뛰어나오며 노인을 보고 난감해 한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니 이것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직원은 벙글벙글 웃는 노인에게 난처한 얼굴을 하고는 무어라 말을 하였다. 그들의 대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직원의 표정과 손짓을 보아하니 아마도, 이곳에서는 더는 돈을 바꿔 줄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노부부는 나보다 앞서 기념주화를 뽑으려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른편에 있는 Information에 갔을 것이고, 그 후에 왼편에 있는 Post office로 가서 동전을 바꿔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어렵게 기념주화를 뽑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뒤이어 외국인인 내가 나타난 것이다.

  쩔쩔매던 직원은 결국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노인은 마침내 동전을 쥔 나를 향해 벙글벙글 웃었다. 그러나 노부부는 나와 함께 다시금 기계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기계 앞에 선 나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 동전을 넣자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노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조금 있으니 기계에서 아주 작은 기념주화가 톡하고 떨어졌다. 그 작은 기념주화를 꺼내 든 나는 돌연, 물결처럼 멀어져 가는 노부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걷던 노부부가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나는 그들을 마주하고는 그들의 언어로 입을 열었다. "xièxiè." 그러자 그들의 얼굴 위로 천진한 웃음이 한가득 떠올랐다. 신선이 웃는다. 그 동그란 웃음 위로 떠오른 투박한 두 손이 내게 잘 가라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완전히 낯선 세상에 다시금 당도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낯선 나라, 낯선 밤의 거리를 다시 걷게 되었을 때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며 우는 것이 부끄러워 까만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고 걸었다. 그 울음은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서러움, 혹은 무엇에서 오는지 모를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어쩌면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과였을 것이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온몸을 침대에 동굴처럼 파묻고는 다시금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나는 완전하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얼굴, 새로운 언어, 오로지 그것으로부터만 강렬한 희열과 어떤 열망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결국 글, 그 속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도, 무엇도 나를 속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며 많은 시간, 강한 외로움을 끌어안고 꺼져 가는 불과 같이 자멸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꿈처럼 새로운 세계에 당도했을 때 나는 어쩐지 전혀 예상할 수 없던, 더없이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리셉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제 더는 타오르지 않는, 이미 소멸된 심지의 끝자락같이 서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괴로웠다. 밤사이 흉흉한 꿈을 꾸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밤이 지나니 환한 아침 빛이 호텔 방 안에 가득 찼다. 창문 너머로 반얀나무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푸른 머리를 곱게 흔든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참을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간밤의 두려움과 상실은 낯선 나라 때문이 아니었다. 그 두려움과 상실은 너무도 변해 버린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집이 아니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모든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칠흑같던 밤은 이미 사멸했다. 아침이 밝았다. 부드러운 아침 해 아래 모든 것이 숨을 수 없이 그 낯을 내놓았다. 거리가 고요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의 거울 속에 내가 있었다. 내가 그대로 있었다. 소멸된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이, 변한 것 없는 나 자신이 그대로 서 있었다.



 


  호텔을 나서자 거리는 고요했다. 간밤의 성난 황소와 같던 그것은 거리의 얼굴이 아닌 나의 얼굴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을 마주하고 또 마주한다. 맑고 강한 눈동자, 기품 있는 고요, 거리에는 그것만이 가득하다. 진실함과 다정함, 그것만이 가득하다. 고요한 얼굴들이 바람처럼 흘러간다.

  백발의 택시 운전사와 낯선 거리를 흘러 들어갈 때에 그가 내게 무어라 말을 하였다. 무슨 말일까, 무슨 말일까. 나는 뒤늦게 번역기를 켜고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아는 유일한 말을 건넸다. "没关系. méiguānxi." 그러자 그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과 같은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되면 방 안에 빛이 가득 들어찼다. 낯선 빛은 아름다운 고가구 위에 스며들었다. 나는 방을 나설 때마다 그 위에 외로움을 올려놓았다. 고단함과 절망을 올려놓았다. 슬픔을 올려놓았다. 어두움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밤에 방에 들어서면 방은 언제나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내가 내려놓고 간 것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말끔한 고가구 위로 새로운 빛이 깃들었다.


  낯선 세계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였다. 하나 나는 이미 아무 종이나 붙들고 무엇이든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천곡은 Balmorhea의 Depth Serenade입니다.

작은 기행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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