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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콩대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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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예랑 Oct 26. 2024

콩대

00. 영상 15도. 마지막 이야기.  

  노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널따란 밭, 고 모양이 꼭 성긴 멧돼지털처럼 삐쭉빼쭉, 바싹 말라 여기저기 시들시들 쓰러지기도 하고 가여운 사람들처럼 모여 섰기도 한 널따란 밭, 그 옆의 또 널따란 밭. 마을 밭 끝자락마다 성긴 나무처럼 마른 장작처럼 드문드문 서 있는 노인들. 그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고 서서 겨눈 활 같은 눈으로, 밭길을 오가는 고것을 쫓는다.

  이틀 전부터 마을 여기저기를 오가던 봉고 한 대가 금일은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부터 검은깨처럼 마을을 바지런히 오가더니 해가 중천에 뜨자 강 노인의 콩밭을 향해 온다. 깎은 태발 같은 콩밭에 서 있던 강 노인은 그것을 보고는 급히 등을 돌려 맨바닥에 곁낫질만 해 댄다. 저만치에서 오던 봉고가 작은 봉분처럼 쌓인 콩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머리가 까만 젊은이들이 검은깨처럼 쏟아져 내렸다. '쟈들은 어제는 회관서 잔체를 하더만, 오눌은 죙일 밧일만 하는가벼. 뭣을 돕는다고. 메칠 있다 금세 갈 그믄서. 밧 죄 망치것구먼.' 강 노인이 일절 돌아보지 않고 허리 숙여 일만 하는 통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밭 끄트머리에 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자기들끼리 소곤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한 남자가 기어이 운전석에서 내려 강 노인에게로 다가왔다. 일손을 돕겠다고 한다. 한 손에는 꺾은 콩대를, 한 손에는 낫을 든 강 노인이 그제야 허리를 펴고 새까만 그늘처럼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부끄러운 양 배시시 웃다가 금방세 우물쩍주물쩍한다. 강 노인은 밭에 들어선 까마귀 떼라도 쫓아내듯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도시서 온 아덜이 메 헌다고 노상 왔다 갔다 하는겨. 헐 일 읎구먼." 빡빡한 쥐눈이콩처럼 서 있는 젊은이들이 강 노인의 말에 두 눈을 뛰룩거렸다. 고 어린 눈들이 콩밭을 도르르 굴러다닌다. 강 노인 곁에 바싹 붙어 선 남자가 강 노인에게 재차 무어라 말하자 강 노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자그마하게 외쳤다. "그럼 거 줏으라." 강 노인은 발끝부터 타작마당까지 이어진 콩대 무더기들을 가리켰다.


  해가 쨍하다. 새까만 머리의 젊은이들이 마르고 비쭉한 콩대다발을 들고 휘청휘청한다. 덩치 큰 젊은네들이 통나무 더미 이듯 콩대에 업혀 가는 것을 가만 보던 강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 눈은 떼지를 못한다. 버석한 이파리, 대에서 묻어난 콩 부스러기가 젊은이들의 큰 몸에 빳빳한 짐승 털처럼 엉키어 미련한 개구락지마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마저도 좋다고 웃어 대는 웃음이 요란하다. 밭 끄트머리 강 노인은 그 웃음을 뒤로하고 새까만 구석뱅이처럼 서서 콩대만 꺾을 뿐이다.


  그때 장 노인이 밭길 따라 자잘자잘 걸어와 밭으로 들어섰다. "쟈들 누겨?" 장 노인의 소리에 강 노인은 허리를 펴고 섰다. "쟈들 어적 갸들 아니여? 오눌 안에 다 못 하겠구먼. 겨, 아녀?" 장 노인이 밭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며 크게 말하자 강 노인은 젊은이들을 힐끔 훔쳐보고는 "내비도. 아덜이구먼." 하며 한구석에 낫을 툭 던져 놓았다. 장 노인이 콩대 끝을 잡고 잘잘하니 바싹 마른 콩코뚜리에서 달그락달그락 콩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장 씨, 저짝으로 가자고." 강 노인이 양손에 도리깨를 하나씩 쥐고 양팔 휘적이며 어기적어기적 타작마당으로 걷자 장 노인도 강 노인 따라 지척지척 걷는다. 두 노인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를 내리칠 적마다 맥 못 추는 콩대들이 펄쩍 튀어 오르고 땐땐한 콩들이 쏟아져 구른다. 고 작고도 실한 것, 누르스름하고 동그란 것이 팔짝 튀어 올라 도르르 구르며 천막 둘러친 돌멩이에 가서 부딪힌다.


  도르르, 탁. 탁, 두르르.


  강 노인이 도리깨를 얼마나 세차게 내리쳤던지 콩알 하나 천막 밖으로 튀어 나가 굴러가자 장 노인이 발을 보채 바지런히 그 뒤를 쫓는다. "여, 여 있네." 장 노인 두툼한 손가락으로 실한 콩알 집어 들고 요리조리 가만히 보다가 허리를 두들기며 일어서 말했다.

  "그번에 말이여, 정 씨네 차가 야밤에 밧골로 빠졌다는구먼. 껌껌헌디 차가 불이 안 키졌나벼. 고 큰 차가 왼쪽 두 바쿠만 질걸에 걸쳐가 차가 홀랑 두집어질까 봐 꿈쩍도 못 허고 한참 있었댜. 차가 삐뚜름해지니께 고 안에서 정 씨네 아들덜이 냅다 악을 쓰는디 정 씨가 메서워 가지고 야야, 니들은 요 창으로 싸게 나가라, 했다는구먼. 그래 작은 아랑 큰 아는 왼쪽 창으로 겨 나왔다는겨. 고담에 두 아가 차를 단디 잡고 정 씨가 겨우 창으로 나왔댜. 그 노인이 울마나 놀랐을꼬. 등어리가 서늘혀." 그러자 강 노인이 그 말을 잽싸게 받아쳤다. "정 씨가 무웟이 노인이여. 아지." "가마히 혀 봐. 인저 이 싣이가 이를 워치게 하나 하고 있는디 저짝에 컴컴헌디서 누가 갑재기, 뭐여 하믄서 띠왔다는 거 아녀?" 장 노인의 그 말에 강 노인은 도리깨질을 하다 말고는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누겨?" "남 씨가 띠왔다는구먼. 그래 남 씨가 거 보고 자전교 타고 이장을 불러왔다는겨. 니랑 나는 저짝에 살아서 모르지, 그날 난리가 났는가. 동네 젊은 아덜이 죄 띠가 꺼내줬는가벼. 남 씨 아니었으믄 일 날 뻔 했다니께." 장 노인은 천막으로 휘적휘적 걸어와 금방 주운 콩알 몇 알을 획 던지고는 도리깨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근디 말이여. 정 씨가 이상한 것이 하나 있댜. 아덜이 차에서 소리 지를 때 말이여. 정신 사나워 잘 못 봤는디, 컴컴한디 거서 누가 암 말 않고 지들을 가만 보고 있는 것 같드랴." "후딱 띠오지도 않고 말이여? 남은 죽겄다고 하는디 귀경났는가 벼. 누겨?" 장 노인은 도리깨를 내리치며 답했다. "몰러.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댜."

  그 말에 강 노인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워째 모른댜. 거 남 씨 아녀? 저급때 불 낸 것도 남 씨 아니여." "아, 기기는 빈집이었잖여. 암도 안 산 지 오래 됐구먼. 도해지 간다고 남자 먼저 간 거 아녀." 강 노인은 장 노인이 누구 편을 드는가 괜스레 섭섭하여 입을 빼쭉이 내밀며 말했다. "도해지를 갔는지 기양 간 건지 모르지. 그래도 말이여, 아내 버리고 가믄 되는가." 그 볼통한 목소리가 장 노인을 쑤심질한 것마냥 장 노인은 다소 큰 소리로 말했다. "뭔 말을 그렇게 하는겨. 남자가 왔다 갔다 했다는구먼. 근디 하루는 집에 오니께 살림은 다 있는디 아덜하고 식구허고만 읎었다던디." "기여? 여튼 내 듣기로는 웬 차가 야밤에 와 그 집 식구 죄 태워 갔다든디. 누가 보니께 뭔 남자가 운전하고 있다드만." 그 말을 듣던 장 노인은 돌연 심드렁하니 도리깨는 던져두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거무죽죽한 손으로 바닥에 구르는 콩을 가만가만 주우며 말했다. "아이, 몰러. 너머 오랜 야기 아니여. 거 아무 사연 없는 집이 있는가. 글고 여 빈집이 그 집 한 집이여? 죄 비어 있구먼. 누가 몰래 살아도 모르지. 암도 오덜 않고. 누가 죽으면 또 빈집 되는 거여. 대간하다, 대간혀." "그릏다고 남 씨가 넘의 집에 불을 내면 되는가." 강 노인은 기운도 안 빠지는지 연신 도리깨를 내리치며 또다시 남 씨 이야기를 꺼냈다. 장 노인은 남 씨,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냈다. "역부로 그런 게 아니라잖여. 담뱃재가 날아갔다 안 혀." "고 작은 것이 그리 큰불을 내는가. 야밤에 불이 났으니 암도 모르지. 기 땜에 동네 홀랑 탈 뻔 한 거 아니여. 기기 근처 정 씨네 집 아니여. 정 씨 죽을 뻔 했잖여." 강 노인이 그 말을 마치자 장 노인은 주운 콩알을 천막 안으로 툭툭 던지며 맥없이 말했다. "그럼 역부로 불낸 늠이 불낸 집 앞서 울고 있냐." 장 씨는 까만 재가 뒤섞여 시꺼먼 땀을 주르륵 흘리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다라를 들고 울고 있던 남 씨를 한참 떠올리다 강 노인이 내리치는 도리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뻘건 불 보니께 갑자기 메서웠나 보지. 아님, 거 집에 뭔 사연이 있는가." 강 노인은 말 끝자락에 군기침을 하며 허리를 세우고는 활처럼 온몸을 구푸리며 몸살을 내고는 한동안 잠잠히 있다가 자그마하게 혼잣말을 했다. "여튼 정 씨 큰일 날 뻔 했구먼."


  콩밭에는 머리가 새까만 젊은이들이 콩대 부스러기를 뒤집어쓴 채 서로 우습다고 손가락질하며 요란을 떨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하던지 나날이 크게 울던 까마귀 소리, 참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처럼 말을 주고받는 두 노인의 말소리도 그에 묻혔다. 평소라면 한나절에 끝낼 도리깨질이 이번에는 좀처럼 끝이 안 났다. 장 노인이 자꾸만 콩밭을 향해 몸을 돌린다. 평시에는 줍지도 않을 콩알을 하나하나 주워 가며 한동안 콩밭만 바라보던 장 노인은 자신의 허연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마당으로 지척지척 걸어오며 조용히 홀로 말했다. '쟈는 인정도 없구먼. 노상 남 씨, 남 씨. 남 씨허고 뭔 웬수를 졌는가.' 장 노인은 아까부터 냅다 도리깨질만 하는 강 노인을 슬그머니 보다가 주운 콩알을 마당으로 획 던졌다.


  장 노인이 다시 오자 강 노인은 슬그머니 도리깨질을 멈추고 장 노인에게 물었다. "그번에 김 씨허고 최 씨허고 쌈은 워찌 된 겨. 이번엔 증말로 큰 소리가 나던디. 김 씨가 악을 쓰니께 엄청이 메섭드라고." "몰러. 첨엔 개 땜시 싸웠다는구먼. 별것 아니었댜. 최 씨네 개가 김 씨네 마당에 자꾸 이상한 것을 물어다 놨다는 겨." "뭣을." "썩은 거슬 죄 쌓아 놓기도 허고, 쥐새깨이 같은 거 있잖여. 그런 것도 놓는가 벼." "증말이여? 와야?" 일순 벼락 맞은 것처럼 묻는 강 노인의 물음에 장 노인은 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장 씨, 근디 말이여. 거 남 씨는 와 있는 겨? 김 씨허구 최 씨 사이에 턱 서 있던디?" 장 노인은 강 노인의 은근한 그 말에 발끈하여 별안간 다시 소리를 높였다. "그라믄 이장은 노상 거 왜 있는 겨. 그날 이장 땜에 싸운 거 아녀." 장 노인은 벌떡 일어나 타작마당 한편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말했다. "김 씨허고 최 씨허고 쌈 날 적마다 이장이 노상 최 씨 편만 드니께 김 씨가 섭하지. 그래서 결국 그 난리가 난 거여." "근디 남 씨가 거 가운데 와 껴있는디. 김 씨가 그날 남 씨헌티 야, 니 그러믄 안 된다, 이러드먼." "아이, 첨엔 쌈을 말리려고 갔는가 벼. 근디 그 품앗이가 문제여. 김 씨네 오기로 헌 날 김 씨가 목을 죄 빼고 기다려도 안 오길래 보니께 남 씨가 최 씨네 밭에 가 있더랴. 반날 이장 감싸지, 남 씨까지 그러니께 고 보고리 같지. 겨, 아녀. 그라믄 보살도 못 사는 겨. 그날 김 씨가 째만해서 구석뱅이에 요릏게 가 있으니께 김 씨가 우스운 거구먼. 최 씨가 등치가 제법 크잖여. 근디 다들 죄 담둑에 붙어서 보고 있으니께 최 씨가 더 등등하지. 잘못한 넘이 큰소리치더만." "거야 최 씨네가 우리 동네서 오야오야 살고 밭도 크고." 그러며 강 노인은 그늘 아래 잽싸게 기어가는 쥐마냥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돈도 많잖여. 그거이 등치 때문인가. 워찌겠어. 겨 아녀?" 강 노인의 말을 듣던 장 노인은 가만있다가 땅에 기어가는 개미마냥 답했다. "겨."

  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장 노인은 한참 뒤 다시 말했다. "그날 보니께 김 씨가 가없드먼. 제 편 없는 것도 서룹을 틴디 마을 사람들 죄 와서 귀경하고 있으니께." 장 노인의 그 말에 강 노인은 서늘한 얼굴로 무릎을 조물조물 주무르며 말했다. "거서 누가 나서믄 갸만 바보 되는 것이여. 남 씨 봐. 대꾸 이짝저짝 쫓아댕기다 거 껴들어 간 거 아녀." 그 말에 장 노인은 혀를 차며 강 노인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근디 왜 말끝마다 남 씨, 남 씨 허는 겨?" 그러자 강 노인은 장 노인에게 검지를 내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김 씨가 고 구탱이에서 씩씩하믄서 울고 있는디 남 씨가 김 씨헌티 대고 '다 서로 좋으라고 하는 거 아녀! 최 씨 말 좀 들어유' 허고 소리를 빽 지르지 않든가. 남 씨 갸는 서글서글하게만 생깄지, 속이 까마구처럼 까맣구먼." "그거슬 워찌게 아는가." "보면 다 아는 겨." 강 노인의 빼쭉한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자 장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는 발 앞의 콩알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강 노인은 그런 장 노인을 보고는 민망스러워 다시 자분자분 말을 꺼냈다. "거 김 씨 아들 띠오니께 최 씨 쳐다보도 못 허고 개 끌어안고 기냥 가 버리드만." 그 자분자분한 말투에 장 노인은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장은 말이여. 저짝에 김 씨 아들 띠오는 거 보고 진즉에 가 버렸구먼." "장 씨는 고것을 그세 봤는가?" "봤지. 나 말고도 다 봤는디 암 말 안 하는겨. 거서 말 꺼내면 바보 되는 겨." 장 노인은 그 말을 하며 두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런 장 노인을 빤히 보던 강 노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근디, 남 씨는 누구 편이랴? 김 씨여, 최 씨여?" 그 말에 장 노인은 기어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양 무릎을 내리치고 또 내리치며 말했다. "편이 어딨는가. 남 씨는 편이 읎어!" 그러고는 야밤의 산군처럼 미간을 획 구푸리며 다시 말했다. "거 죄 노인인디 다 늙어서 서로 뭣 허려고 노상 싸워, 싸우기를." 그러자 강 노인은 두툼한 손을 천천히 들어 가만가만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노인은 사람 아녀?" 장 노인은 강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흔들며 이미 버썩 마른 땀을 훔쳤다.


  깨진 플라스틱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던 강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마당 한편으로 걸어가자 그새 모여든 참새 떼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이 새들이 문제여. 야들이 뗴로 와서 콩알 쏙쏙 빼먹는 것도 모자라 콩대를 죄 꺾어 놓고 가니... 이짝에서 쫓아내면 저짝 가서 죄 파먹고, 저짝 가면 또 이짝으로 오고. 한 놈이면 모를까 떼로 오니께.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겨." 장 노인은 도망가는 참새 떼를 보며 그날, 구석에 서 있던 작은 김 씨를 떠올렸다. 어디선가 서둘러 뛰어온 김 씨 아들이 성난 눈을 부릅뜨며 '뭐 귀경났능교!' 하고 벼락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치자 담 너머 구경하던 이들 모두가 꼭 저 참새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장 나중에 김 씨를 살피며 우물쭈물 나온 것은 남 씨였다. 장 노인은 그날을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쟈들도 우리가 우스운가 보지." 장 노인은 타작마당 한구석에서 볼품없이 흩날리는 비닐처럼 손을 휘적거리는 강노인과 그 뒷발치에서 콩을 쪼는 참새 떼를 보며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와 거무죽죽한 손으로 입을 훔쳤다. 강 노인은 팔을 휘두르다 말고 지척지척 걸어와 도리깨를 집어 들며 장 노인에게 말했다. "쟈들이 뭔디 내가 우스워. 이미룩저미룩하덜 말고 일어나슈."


  두 노인은 다시 도리깨를 집어 들었다. 노인이 도리깨를 내리칠 적마다 말 없는 콩대들이 들썩들썩 튀어 오르고 속침 같은 콩알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머리가 까만 젊은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민둥한 콩밭 여기저기서 데구루루 구른다. 평시 같으면 두 노인이 서로 박을 타며 아무 말 없이 도리깨만 내리쳤을 것인데 이번에는 여간 손발이 맞지를 않는다. 도리깨질을 하던 강 노인이 결국은 도리깨를 던져두고 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로 걸어갔다. "야야, 저짝까지만 줏고 그만 혀." 머리가 까만 젊은이들이 강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야단을 떨며 몰려간다. 그 모양이 꼭 새까만 콩이 굴러가는 것 같아서 두 노인은 아예 뒷짐을 지고 서서 가만가만 바라볼 뿐이다.

  "근디." 장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거 서울서 연락은 오는가?" 장 노인의 그 말에, 망연히 서 있던 강 노인이 획 뒤를 돌며 뱅긋한 낯으로 장 노인에게 말했다. "우리 아덜 말이여? 연락 오지. 이번에 오면 주려고 저 담군 거 아녀." 강 노인은 자신의 고옥 한편을 가리키며 슬며시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장 노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전 오지도 않으믄서." 귀 밝은 강 노인은 금방에 던져 놓은 도리깨를 획 낚아채며 장 노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는 그짝 아덜은 오는가. 코빼기도 못 봤구먼. 으디로 간지 알지도 못허지." 그 말을 들은 장 노인은 붉으락푸르락하여 "자네가 뭘 아는겨." 하고는 고성을 냈으나 일어서지는 못 하였다. 성난 두 얼굴 곁으로 모여든 참새 떼가 콩을 쪼고 있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노인은 서로 쓴입만 다셨다. 참새 떼가 마당을 뛰놀아도 꿈쩍도 않는 강 노인을 보다 못한 장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참새 떼를 내쫓았다.


  쌀쌀한 도리깨질 소리에 새들이 지붕을 뛰며 운다. 두 노인의 얼굴에 송골송골 돋은 땀이 검은 천막 위로 후드득 떨어질 즈음에야 강 노인이 입을 열었다. "대간하다. 대간혀." 그 소리에 장 노인도 곧장 도리깨질을 멈추었다. "오눌은 못 허겠구먼. 쟈들 때문에 정신이 읎어." 강 노인은 콩밭을 뛰는 젊은이들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장 노인에게 말했다. 장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바지에 붙은 콩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 냈다. 까마귀가 점차 크게 울었다.

  "강 씨, 거 들었는가. 저짝에 말이여. 워떤 놈이 박 씨네 집으로 들어가려 했나 벼. 근디 문이 안 열리니께 창으로 들어가려고 했나 벼. 박 씨네 집 창문이 요, 요 콩만 헌디 고늠이 고 창으로 뱜처럼 꼬무락꼬무락 겨 들어갔는가 보구먼." 그 말을 들은 강 노인이 두 눈으로 크게 뜨고 물었다." 집에 암도 없었는가?" 장 노인은 무릎에 붙은 부스러기를 저분저분 집으며 말했다. "몰러. 남 씨가 지나가다 봤댜. 그래 남 씨가 고늠을 가만가만 사려보다 이상해서 소리를 꽥 지르고서 바짓가랑이를 꽉 잡았다드만. 근디 그늠이 창문에 꽉 껴서 다리를 훠훠 들믄서 잘못했슈, 하고 소리를 치더랴. 근디, 꺼내고 보니께 우리 동네 사람이랴. 갸가 남 씨헌테 지는 빈통이구먼유, 하고 울어 가지고 남 씨가 야야, 담에는 그러지 마라, 하고 그냥 보냈다는구먼." "기여? 갸 누겨?" "몰러. 내 아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장 노인에게 강 노인은 다시 물었다. "근디.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는가?" "박 씨가 말해 줬구먼. 박 씨가 남 씨한테 들었댜. 근디 문은 꼭 잼켰는디 뭣이 읎어지긴 했다는구먼." 그러자 강 노인은 두 눈을 회동그래 뜨며 장 노인에게 서둘러 말했다. "남 씨가 그런 거 아녀? 그 뱜이 남 씨 아녀?" 강 노인이 득달같이 뱉은 말에 장 노인은 산그늘 같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서 강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 노인이 빼쭉한 입으로 쏘아붙였다. "그짝이야말로 와 자꾸 남 씨 편을 드는가! 생각을 혀 봐. 우리 마을에 요 창으로 들어갈 몸이 남 씨 말고 워디 있는가." 박 씨네 집 창문은 아주 작았다. 아닌 말로 콩알만 했다. 장 노인은 바닥에서 구르는 콩알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 노인의 그림자가 점차 길어진다. "남 씨가 나쁜 겨." 고 작은 콩알을 가만가만 바라보며 한참 말이 없던 장 노인은 강 노인이 툭 던진 그 말에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그런가. 기여?"


  마지막 콩대다발을 양손에 쥐어 든 젊은이들이 모두 타작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강 노인은 두 손을 탁탁 털며 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야야, 가서 둔눠라. 둔눠. 병나겄다." 강 노인의 그 말에 머리가 까만 젊은이들이 제 옷을 툭툭 털고 야단을 떨자 그 큰 몸에서 콩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장 노인은 먼발치에 망부석처럼 앉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덩치 큰 젊은이들이 작은 봉고 안으로 모두 들어가고 봉고 문이 닫히며 한나절 요란하던 소리가 바람 빠지는 비닐마냥 봉고 안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작은 봉고가 젊은이들 모두 태우고 밭길 따라 벌써 저만치 갔다. 강 노인은 봉고가 떠난 지 한참인데도 봉고 떠난 자리에서 꼼짝을 않는다. 장 노인도 애먼 콩알만 두꺼운 손 위에 올리고 도르르 도르르 굴릴 뿐 말이 없다. 한 무리의 참새 떼가 타작마당으로 모여들고 또 모여들어도 장 노인은 더 이상 손을 휘젓지 않았다. 도리어 지척지척 걸어오는 강 노인의 작은 발소리에 참새 떼가 사방으로 날아가고 입을 꾹 다문 두 노인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도리깨를 든다. 서로 박자에 맞춰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도리깨를 내리치고 또 내리친다. 작은 봉분 같은 콩대무더기 옆 타작마당에서 콩대 두들기는 그 소리에 어느 새조차 날아들지 않고 한 무더기의 콩대들만 펄쩍펄쩍 튀어 오른다.








'콩대'를 마지막으로 연재 <콩대>를 마칩니다.

<콩대>의 시간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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