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을 책으로 배울 수 있나요?
— '사랑'을 주제로 진행된 어느 독서모임의 참가기 입니다.
가는 길
저는 자타공인 독서모임 매니아 입니다. 여건상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여러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몇 개월만에 'K 독서모임'에 참가했습니다. 아내가 여러 업무를 무릅쓰고 일찍 퇴근해서 총총이를 픽업해 준 덕분입니다. 아내의 배려와 희생이 고맙습니다.
퇴근할 무렵 직장 동료가 저에게 묻더라고요. "불금인데, 오늘도 아이 데리러 가요?" 그래서 "아뇨. 오늘은 독서 모임 가요."라고 답했습니다. '대체 왜...?'라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이런 절호의 찬스에 맥주를 마셔야지 하며 "벙개 하자"는 걸 뿌리치고 모임 장소로 향했습니다.
진행
갑작스럽게 모임 진행을 맡았습니다. '진행자'가 따로 없이도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는 모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진행방식이 있었습니다. ‘개인/팀 회고’를 진행하기 위한 훈련이 되겠다 싶기도 했고요.
먼저, '체크인'부터. PyO님이 온라인 독서모임을 할 때 쓰셨던 '체크인 하면서 에너지 레벨 말하기'를 해봤습니다. 지금 자신의 에너지 수준을 1-5점 척도로 이야기 하면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했습니다. '체크인' 이후에도 '에너지 레벨'이라는 용어가 자주 얘기되었습니다.
발언이 몇몇 참가자에게 집중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상적인 발언 배분율은?) 모임에 자주 참여하지 않아서 상황 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언이 너무 없는 분께 기회를 드리는 시도는 해봤습니다. 그걸 ‘볼 점유율’이라는 용어로 표현해봤어요. “OO님, 지금 ‘볼 점유율’이 낮으신데, 제가 패스 한 번 해드릴게요.”
주제는 오, 사랑!
'K 독서모임'의 이번 시즌 진행 방식은 공통 주제 & 자유 도서 입니다. '주제'를 정해두고 그 '주제'에 맞는 책을 각자 찾고 정하고 읽고 모이고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아래와 같은 책을 정하고 읽어왔습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3)
성경 (2)
아직도 가야 할 길 (1)
마티네의 끝에서 (1)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1)
향연 (1)
알랭 드 보통이 쓴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무려 세 분이 읽고 왔습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연애 vs. 결혼'으로 흘러갔습니다. 기혼자 비율이 높은 모임이었습니다. 대화를 하며 알게 된 점은 '결혼은 다들 힘들어 하는구나' 였습니다. (유명 배우 부부가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는 뉴스 때문일가요?)
사실 '사랑'과 '결혼'은 관계가 없...죠?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맞지만, 결혼해서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안 맞잖아요. 사랑해서 결혼한다지만, 그 사랑은 결혼 전후 변함이 없나요? 뜨거운 사랑과 행복한 결혼 생활, 이게 항상 함께 가는 것인가요?
두 사람이 만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건과 그 두 사람이 혼인 관계가 되는 사건, 이 두 사건이 강한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것. 그것도 하나의 '아이디어' 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아이디어'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그게 좋다/싫다, 옳다/그르다를 떠나서요.
오히려 '사랑'과 '결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다더군요: "우리는 함께 십 몇 년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결혼을 할 준비가 되었다.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단념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사랑을 넘어선 사랑
논의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파트너(애인 또는 배우자)와의 사랑을 지나 '대상'(예술)에 대한 사랑(반 고흐), 어떤 탁월함의 경지에 올라 상대방이 더 나아질 수 있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eudaimonia, arete)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갔습니다(향연).
인간이기에 부족하지만 한 차원 높은 경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솔직히 공감이 어렵더군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 없이 아낌 없이”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을 감히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갈망이 없는 상태가 자연스러운 사랑. 아무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그런 사랑을요.
고지가 너무 높으면 오히려 포기하고 싶어지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제 마음이 딱 그랬습니다. 저는 주기만 하는 사랑은 결국 주는 쪽에 고갈이 찾아오거나 받는 쪽에서 이 사랑을 오해하거나 하는 파국을 맞이할 거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저와 다른 그리고 좀 더 고귀한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니,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늘의 수확: 알지만 행하지 않았던 것
모임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한 두 번 뵙고 자주 뵙지 못한 분들 그리고 오늘 처음 뵌 분들과 함께 '사랑'을 주제로 여러 층위의 이야기를 넘나들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저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도 (잊고 있었는데)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을 더 나아지게 한다는 명목으로 눈 앞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 드물지만 이 방법이 통하는 때도 있겠죠. 서로에 대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여 어떤 말을 해도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있긴 하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합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먼저 이야기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도록 진득하게 기다리고 상대방이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행하지 못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모임에 참가한 다른 분의 입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니 완전히 새롭더라고요. '아. 내가 처한 지금 상황에 적용되고 발휘되어야 할 지식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런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마무리
무려 2시간 30분 가까이 모임을 했습니다. 짧게라도 한 마디씩 오늘 모임에 대한 회고를 하자고 제안했고, 참가했던 모든 분들이 모임 시작 때보다 끝날 때 에너지 레벨이 높아졌다, 모임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간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실은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모임 마치고 집에 와서 잠을 못 이루고 이렇게 참가기를 남깁니다. 남기고 나니 또 좋네요. 아침이 되면 함께 독서모임 했던 분들께 이 글의 링크를 보내드리려고요.
독서모임은 역시 좋아요. (주차비 비싼 곳에 오래 주차하지만 마세요... 주차비로 책 두 권 값 내고 멘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