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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chpapa May 09. 2018

나는 아빠 이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다

정우성, «나는 아빠다»(2013)를 읽고


아주 예전에 읽으려고 뽑아두었다가 어버이날(!)에야 읽었다.


실은 이 책의 저자인 정우성 변리사님과 페이스북 친구 — 몇 해 전, 특허전쟁이라는 주제로 대검찰청에서 강연을 하셨던 것을 계기로 — 라서 이 책에 관하여 무어라 적는 것이 조심스럽다. 쑥쓰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나니 뭐라도 쓰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용두사미가 될지언정 글에서 도입부는 역시 중요하다.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내면 사회는 아이들의 등짝에 태엽을 감아서 집으로 돌려보낸다. 나는 아이들 등에 감겨 있는 태엽을 풀어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p.9)


초반에 이런 문장을 접하면 책의 다른 구석에는 또 어떤 문장들이 숨어있을지 기대감이 생긴다.


비록 초보아빠이지만 동의하는 지점을 발견하면 동지라도 찾은양 힘을 얻기도 한다. 


“우선, 나는 ‘안 돼’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므로, 안 되는 것을 ‘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해서 아이들의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p.68) 


꽉 막힌 아빠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환상세계로 이끄는 ‘갓 지어낸 이야기’들(<환상세계로 들어가는 열차>),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지루한 실천이 없이는 쓸 수 없었을 ‘밥 먹이기’, ‘목욕시키기’, ‘양치질하기’와 같은 소재들(<차원 바꾸기 놀이>, <아빠의 물건>)을 읽을 때는 나와 아이 사이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상들을 떠올리며 즐거웠다. 언젠가 나도 이런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사실 이 책의 대미는 육아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육아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육아가 어렵다면 인류는 벌써 종말을 맞이했을 것입니다.”(p.224) 맞네요. 끄덕. 그럼? 제3장의 제목인 “지금 행복한 부모가 늙어서도 행복하다.”이다. 시중의 어떤 육아 서적들은 ‘아이의 행복’만 이야기한다. ‘육아’ 서적이니 그렇겠지만, 육아 서적을 뒤적이는 사람은 주로 부모이다. 그러니 부모 자신들의 행복이 먼저 말해져야 하는데 대부분 생략한다.


“아이의 행복,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양육하기 위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인생의 꿈이 있다. 서로가 빛나기 위해서, 서로를 빛내주기 위해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우리는 각자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나는 아빠다. 그렇지만 아빠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다.”(p.143)


무척 중요한 얘기지만 아직 작고 여린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파묻히면, 솔직히 말해서, 자꾸 잊는다.


‘한 여자의 남편’인 사람들이 이 책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부분이 한 군데 더 있다. <합리성의 과잉을 내려놓다>라는 꼭지에 담긴 글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것이지 어떤 합리성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상식, 통념이라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부부 두 사람의 결정으로 따를지 말지를 정할 수 있다. 그것이 부부의 일이자 특권이다.


이 꼭지를 읽으며 육아휴직 중에 있던 아내와 가사 분담을 논하면서 꼬치꼬치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던 나의 ‘빛나는’ 합리성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내와 아이들에 대하여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자 역시 한때는 “당신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 하루 종일 편안히 있었으므로 저녁 시간에는 남편을 위해 좀더 따뜻하게 배려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 같았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p.147). 솔직하게 써주셔서 고마웠다.


맞벌이 부부로서, 매일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한 현재의 조건과 상황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고 있다. 퇴근 후 아이를 하원시키느라 바쁘고 집에 와서는 아이를 재우기 전까지 먹이고 씻기고 같이 노느라 잠시도 쉴 수 없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이런 나의 삶을 딱하게 여기는 어른들을 가끔 만나지만(주로 밖에서), 나는 아랑곳 않고 행복의 길로 걸어간다. 그 길에서 이런 책을 만나 다른 무엇이 아닌 남편이자 아빠로서 공감할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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