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 박세희 Dec 24. 2020

달리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달리기로 2020년 한 해를 돌아보기

올해 4월, 매일 아침 운동을 목표로 가열차게 달렸다. 그 경험을 글로 남겼다: 아이 둘 아빠의 아침운동 예찬론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보니, 현실적으로 운동을 할 시간은 새벽~아침 일찍 밖에 없었다. 아침 운동 습관을 만들고 싶어 애를 썼다.


20일 가까이 지속되던 매일 아침 운동은 어느 순간 갑자기 중단되었다. 습관 만들기에 실패했다. 5월에도 뛰었지만 4월의 기세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운동을 멈추고 살았다.


2020년 달리기 기록 (거리 및 횟수)


원인이 있었다. 오른 무릎이 아팠다. 무릎 보호대를 구해서 착용해봤다.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오래 착용하면 외려 무릎이 약해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됐다. 무릎 보호대는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니었다.


7월 초에는 농구를 하다 왼쪽 발목을 다쳤다. 뚝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접질렀고, 3주 정도 절뚝거리며 고생했다.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가을 정취를 즐기며 달렸다


가을이 되니 다시 달리고 싶었다. 가을은 러너들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때마침 2020 LIFEPLUS JTBC 서울 마라톤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즈음 아빠 운동 모임에 합류했다. (이건 올해의 잘한 일로 꼽을 수 있다.)



다시 달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왼쪽 발목이 회복되었다. 달리면서 보는 가을 풍경이 몹시 아름다웠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나날이 늘어서 그랬는지 올해 가을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풍경을 보며 달리니 마음 깊이 행복함이 차올랐다.


달리고 있으면 내 마음 속에 저 아래 달라붙어 있던 감정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올해 2월에 영면에 드신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났다. 달리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숨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달렸다.


9월 즈음에 4주 다이어트를 해서 체중을 뺐는데(이 경험도 글로 남겼다: 살 빼면 정말 좋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고 싶어 쓰는 글), 덕분에 무릎이 덜 아팠다.



무릎이 덜 아프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을부터는 달리는 거리와 속력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4월 달리기는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싶다, 더 빨라지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였다. 그래서 속력을 냈고 보폭을 넓혔다. 그게 무릎에 좋지 않은 영향으로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록을 필요로 하는 선수도 아닌데, 대체 왜.


그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 나는 심지어 달리기에서조차 매일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그걸 성취하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러너들이 남산 남산 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을부터는 그저 오래, 자주 달리고 싶었다. 달리는 순간을 더 깊고 오래 즐기고 싶었다. 달리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 3일에 한 번 달리다 이틀에 한 번 달렸다. 주말에는 아빠 운동 모임에 나오는 분들과도 함께 달렸다. 달리면서 주고 받는 대화가 좋았다.


몰입을 연구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쓴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을 읽다 내가 느꼈던 경험이 서술되어 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과 함께 달리면, 대화에 푹 빠져 먼 거리도 수월하게 달릴 수 있다. 대화는 지루함과 일상생활의 압박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금방 흘러간 것처럼 느끼게 한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시간 개념을 잊는 기술을 더 깊이 습득하면, 대화가 몰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코우덴부르흐와 포스트메스, 고르디진은 쉴 새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대화에서 화자가 만족감과 함께 사회적 확인(social validation)을 느낀다고 밝혔다. 즉 자신의 감정이 옳고 정당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 순탄한 대화는 춤을 추는 것처럼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매끄럽게 오가게 하므로 대화가 깊어지면 몰입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을 북한산 둘레길 러닝


아빠 운동 모임 덕분에 산길 달리기, 트레일 러닝을 경험했다. 기록을 위해 가급적 평지만 달리고 싶어했던 내가 북한산 둘레길을 뛰었다. 숨이 차면 걷고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뛰고 그러면서 트레일 러닝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파타고니아 WHY I RUN? 영상 시리즈를 보며 고무되었다.



위 영상에서 박준섭님이 하신 말씀이 정말 좋아 아래에 기록해본다:

“보통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빠른 기록을 가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달리기를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몸이 다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냥 달리기를 모험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험하는 모든 과정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천천히 달려야 해요. 나의 호흡과 리듬에 맞춰서요..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달려봤으면 좋겠어요 .”


이 북한산 둘레길 러닝이 분기점이었다. 그때부터 코스를 바꿔 집 근처 야트막한 동산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지를 고집하지 않으니 코스를 자유롭게 짤 수 있었다. 매일 같지만 다르게, 달려보지 않은 길을 모험하듯 달리고 탐색하며 달렸다.


산길 달리기 경험이 쌓이자 오르막에 자신감이 생겼고, 거리와 기록(페이스)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옅어졌다. 달릴 때마다 코스가 달라져서 비교 대상이 없었다. 세상 누구도 굳이 나와 같은 코스로 달리지 않는다. 같은 코스로 달린다 해도 각자의 레이스를 할 뿐이다.


달리면서 나는 예전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까? 그건 알 수가 없다. 다만, 예전보다 더 나다운 인간이 된 것 같기는 하다. ⟪달리기와 존재하기⟫에서 조지 쉬언은 이렇게 썼다:

“달리기는 남을 의식한 행동과 생각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먹고 자고 남은 시간을 즐기는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 일과 휴식을 바라보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24시간 나를 지켜볼 수 있게 됐다.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나만의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동이 터오는 장관을 보며 달렸다


12월.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왔다. 아침 기온은 점점 낮아졌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무척 찼지만, 아랑곳 않고 달렸다. 막상 달려보니 영하 10도까지는 괜찮았다. 이것도 달리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다. 겨울 달리기는 또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11월 말의 어느 때부터 오늘까지 (일요일은 쉬고) 매일 달렸다. 매일 달린 게 대단한 일인가? 글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린 게 대단한 일인가? 글쎄.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래도 좋다. 분명한 건 잠들기 전 눈 뜨고 일어나 달릴 일을 생각하면 설렜다. 내일 아침이 기다려졌다. 즐거웠다. 즐겁게 달렸다.


달리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솟구쳤던 맥박이 잔잔해지고, 달구어졌던 몸이 제 온도를 찾았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면 마음도 한결 편안했다.


무릎은 아직 괜찮다. 체중이 줄고 거리와 속력에 대한 집착을 놓아서 무릎에 데미지가 줄어든 것 같다. 추측이다. 운동 전후로 스트레칭과 폼 롤러 마사지를 꼼꼼히 하고 있는데, 이건 확실히 도움이 됐다.


함께 달리면 혼자 달릴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지난 주말 아침,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리기를 했다. 올해 가장 길게, 오래 달려보고 싶었다. 하프 마라톤 거리를 뛰기로 했다. 한강대교에서 잠수교까지를 두 번 왕복하는 코스. 혼자 달려도 어떻게든 달렸겠지만, 아빠 운동 모임을 함께 하는 분께서 전반 10km를 같이 달려주셨다.


그 10km, 약 한 시간의 달리기가 내겐 엄청난 응원이 됐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생각지 못한 느낌이었다.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잊고 싶지 않아서 글로 남겼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누군가의 걷기, 달리기를 함께 하겠다고.


올해 들어 주변 사람들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급적 오래 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건강하자. 오래 보자. 내가 백날 얘기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 달리면서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지만,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다.


달리기는 분명 혼자만의 것이고 고독한 운동이다. 그러나 함께 달리기는 혼자 달릴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그 기쁨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러니까 이제는 함께 걷자, 함께 달리자고 말을 건넬 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 마지막 달리기를 마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