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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chpapa Aug 12. 2021

내가 나를 챙겨야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씁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 야심한 밤이었기에 길게 뛸 생각은 아니었다. 새로운 코스를 탐험하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늘 뛴 코스는 지난 겨울에 새벽마다 달렸던 코스이다. 그땐 눈을 뜨면서 궁금했다. 오늘은 대체 얼마나 추울까. 그리고 얼마나 더 추워지면 나는 뛰는 걸 그만두게 될까. 


그런데 영하 15도가 되어도 뛰는 건 할 수 있었다. 전날 눈이 내려 길이 얼었어도 뛰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뛰고 뛰지 않고는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구나. 그때 알았다.



땀을 내고 집에 오니 기분이 한결 낫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가? 잘 모르겠다. 남달리 빠르다거나 심폐지구력이 뛰어나 오래 달릴 수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다시,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가? 아마 그런 것 같다. 왜? 길든 짧든 빠르든 느리든 달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기분이 좋다. 그 기분을 해부해보면, 뿌듯함, 성취감, 충만함 같은 게 자리하고 있다.


달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땐 스스로가 기특하다. 대견하다. 잘 했어. 오늘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했구나. 내가 나 자신을 챙겼구나. 그건 정말 잘한 일이야.


생각해보면 꼭 달리기가 아니라 무언가를 먹을 때, 몸을 씻을 때, 옷을 입을 때, 잠자리에 들 때. 언제고 나는 나 자신을 챙길 수 있었다. 대충 때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매 순간 극성스럽게 살 필요는 없지만, 내가 나를 챙긴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어렵고 막막함 속에서도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다.


빈 병에 희망의 연기가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둘째 아이에게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신경질 섞인 화를 냈다. 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갈고 엉덩이를 씻기는 중이었는데 둘째 아이가 자지러졌고 나는 그걸 참지 못했다.


거실에 있던 첫째 아이가 내가 화내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 짧은 새 목이 쉬어버렸다.


나는 화는 물론이고 그 직후에 찾아온 자괴감 때문에 힘들었다. 자괴감이 나를 괴롭힌 게 아니라 화를 낸 내가 자괴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첫째 아이를 돌보며 이제 나도 레벨업을 했다고 자평했는데, 아니었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좋은 아빠라고 자신했던 순간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미안하다고 하는 내 자신이 미웠다. 아이들의 용서를 구하는 건 아니었지만, 미안하다고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는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나도 그 가벼움에 소스라쳤다.  


나의 연인이자 동지이자 전우인 아내에게 나의 죄를 고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내가 건강한 상태일 때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얘기해줬다: 오빠는 진짜 진짜 너그럽고 관대해. 그런데 가끔 너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때가 있어.


그러니까 내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다. 기분파. 나도 내 아버지와 닮았구나. 씁쓸했다.


해법이 퍼뜩 떠오르진 않는다. 건강한 상태이고 싶다.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아빠다. 넓어서 품어줄 수 있고, 깊어서 담아줄 수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내 문제는 내가 풀면 된다. 내 문제로 받는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반사하진 말자. 그러니까, 내가 나를 챙겨야 한다. 성숙이란 자기 자신을 달랠 수 있는 수단을 다양하게 갖게 되는 과정이기를 바라면서.


이중섭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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