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인과 김훈의 남한산성
남궁민 배우 주연의 드라마는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이번 드라마 [연인]은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제목부터 대놓고 멜로를 표방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나마 상대가 항상 씩씩한 안은진 배우라는 점이 다행이었달까. 거기다 배경이 병자호란 무렵의 조선이다. 전쟁과 피난의 시대와 얽힌 두 남녀의 이야기는 과연 따분한 사랑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훈이 쓴 [남한산성]은 책으로도 영화로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드라마 연인을 보게 된 계기로 병자호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남한산성]을 읽기 시작했다. 병자호란에 관하여 김훈은 대체 어떻게 쓰고 있나 궁금했다. 좋은 문장을 넘어 대단한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표현이 정말 좋아서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한산성] 속 김훈 작가의 문장을 옮겨봤다:
- 노비가 왜 자식을 낳는 것인지 정명수는 알 수 없었다. 아비와 함께 묶여서 아전이 때리는 매를 맞고, 어미와 함께 얼어서 부둥켜안고 잠드는 날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 조선 조정은 정명수의 입을 통해서 칸의 표정을 더듬었다.
- 먹을 때는 모여서 먹어도 똥은 각자 내지르는 것이옵니다.
-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 용골대의 눈에 조선 행궁의 용마루 선과 지붕물매의 기울기는 수줍어 보였다.
-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 것이었다.
- 올 때는 가벼울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지랄인가...
- 덜 죽은 자들이 북문을 향해 눈비탈을 기어오르다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 겨우내 묵은 몸속으로 냉이 국물은 체액처럼 퍼져서 창자의 먼 끝을 적셨다.
-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 필요없다. 안 보여도 너희는 뵌 것과 다름없다. 날이 밝으면 해가 뜬 것 아니냐.
- 이시백은 알았다. 봄이 아니라 칸의 문서가 눈구덩이 속에서 겨울을 난 저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 네가 너의 분뇨와 액즙의 일을 문장으로 적어서 어전에 고하였느냐?
- 최명길의 시선이 벼루와 먹 사이에서 갈렸다. 새카만 묵즙이 눈에서 나오는가 싶었다.
- 얼음의 힘이 빠지면서 얼었던 흙은 죽처럼 흘러내렸다.
- 상헌은 과연 백이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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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남한산성]은 개정판으로 2007년 초판 발행 이후 십 년 만에 100쇄를 넘기면서 작가 김훈이 직접 [못다 한 말]을 덧붙인 책이었다. 이 30쪽 가량의 분량이 과연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김훈의 명문 앞에 독자인 나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