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농담을 들었다. [하트시그널]을 보면 젊은이고 [나는 SOLO]를 보면 늙은이라는. 반박이 어려웠다. 나는 후자가 맞으니까.
[하트시그널]과 [나는 SOLO]. 일반인(?) 출연 연애 예능이라는 공통점만 빼면 두 프로그램의 빛깔은 참 다르다. 한 쪽이 베이지톤으로 그려진 동화라면, 다른 한 쪽은 노 필터 밀착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SOLO]에서는 남녀 각 여섯씩 총 열 두 명의 참가자가 애정촌(?)에 모여 자신의 짝(?)을 찾는다. 기발한 사회 실험이다. 제한된 장소, 시간, 인원 내에서 짝을 찾는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낮다. 유일한 승자는 이 실험을 설계하고 시청률을 뽑아내는 제작진이다.
다 안다. 그럼에도 이 특수한 환경에 놓인 출연자들을 때론 관심, 때론 연민으로 흥미롭게 바라보게 된다. 남녀 사이에서 오고 가는 대화와 다채로운 반응 양식을 보며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지만 동시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한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건 타고난 천성(유전적 요소),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로부터 받은 영향(가족 문화적 요소), 특정 사회 환경과 교육 제도의 결과(사회 학습적 요소)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늙은이에 가깝게 된 지금은 과거의 내가 내렸던 사소한 결정들이 차곡 차곡 쌓여서 지층 같이 굳어진 부분이 더욱 도드라지게 인식된다.
아마도 그 부분이 내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오늘의 나의 자존감과 효능감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 그것이야말로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상처에 대한 반응은 오늘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다. 쉽게 아물었다면 애초에 그게 상처였겠는가. 과거의 상처를 입은 나에게 위로와 공감을 요구하는 마음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늙은이가 되어가는 그때까지도 ‘너가 나에게 주었다. 너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가 나를 슬픔에 빠뜨렸다.’ 계속 너, 너, 너, 너...를 먼저 거론하며 살아갈 것인가. 내가 받았다는 그것은 정말로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던 것일까. 발신인 불명의 우편물을 우편함에 쌓아둘 필요가 있을까.
늙은이 특. 이처럼 웃고 넘기면 될 예능 프로의 한 토막에 대하여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한 소리를 남기고야 만다. 짝을 찾기 위해 용기 내어 이런 공개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춘들을 응원한다. 부디 서로를 편안에 이르게 하는 관계를 이루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