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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의 하루 Sep 10. 2023

베란다 보안 취약성을 삼다수로 방어하라

살림 이야기를 글로 되살립니다

스타벅스보다 더욱 개방적인 우리 집 베란다


개방적인 공간을 떠올린다면 제일 먼저 카페 스타벅스가 떠오른다. 공공시설을 제외하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스타벅스는 정책상 무료로 매장이용이 가능하다. 음료나 기타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카페 내에 앉아서 쉴 수 있다는 뜻이다. 직원들은 무료 이용 고객에게 아무 말 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고 한다. 한국 스타벅스에도 본사 정책을 그대로 들여온 모양이다. 마치 스타벅스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는 듯하다. 이용자들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 음료를 주문하고, 무료 이용객들 역시 잠시만 머무르다 자리를 비우는 듯하다. 스타벅스 이용 꿀팁을 전하려던 것은 아니고. 스타벅스 다음으로 개방적인 공간을 묻는다면, 우리 집 베란다를 꼽을 테다. 어쩌면 스타벅스보다 더욱 개방적인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새벽 5시 눈이 떠졌다. 배꼽부터 코끝을 따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느낌에 집중하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뒤척였지만, 다시 잠이 올 기미는 없었다. 흘러내리는 잠옷 바지를 추켜올리며 거실로 걸어나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어둡지만 컴컴하진 않은 암흑 속에서 창밖은 고요했다. 요 며칠 비 소식이 들리더니 안개가 낀 듯 보였다. 소파에 누워 눈을 깜빡거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소파와 습한 공기와 나는 찰싹 달라붙었다. 셋은 하나가 되었다. 창호 밖으로 희미하게 하트 시그널이 보였다. 분명 회색의 하트 모양이었다.


‘저게 뭐지? 전에도 있었던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뭔가 있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했다. 눈을 껌뻑껌뻑 떴다가 감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유리 굴곡에 왜곡되어 보이는 모습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어둠 속에서 초점이 안 맞기도 했고. 시력 하나는 양쪽 모두 1.0으로 좋다고 자부했었는데, '나도 시력이 나빠지는구나. 나이 든다는 게 이런 걸까.'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아침, 지난 새벽에 보았던 헛것이 떠올랐다. 베란다로 나가는 길에 유리 너머로 바닥에 하얀 십원짜리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지난밤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촉촉한초코칩보다는 건조하고 초코칩쿠키보다는 촉촉해 보였다. 그렇다. 새 똥이었다. 내 눈을 의심할 일이 아니었다. 내 시력은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함과 확신을 얻었다. 혼자는 아니다. 분명 둘이다. 한 마리가 만들기엔 똥의 양이 과했다. 이 호랑말코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빗자루를 들고 베란다 밖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새의 흔적일까. 까치일까? 설마 비둘기일까? 제비는 아니겠지?'




비둘기는 몇 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우리 집은 10층이다. 비교적 층높이가 높게 지어진 건물임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아파트 기준으로 12~14층 정도의 높이다. 비둘기가 이렇게 높게 날 수 있을지 의심을 품던 순간 또다시 시력을 의심했다. 창밖으로 비둘기 떼가 퍼뜩 거리며 앞 동 아파트로 날아갔다.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고 배우라는 듯이 심지어 우리 집보다 더 높은 층을 향해 날갯짓하며 떠나갔다. 공원 잔디 바닥에서 만났던 비둘기들은 모두 정체를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베란다로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가. 정답은 베란다 형식에 있다. 우리 집 베란다는 외부 공간 사이가 뻥 뚫려있는 구조다. 거실에서 베란다로 이어지는 부분에만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게다가 베란다 조명 위로 평평한 모양의 갓이 있었다. 둘이 붙어 앉아서 쉬기 딱 좋은 크기였다. 비둘기 쌍에겐 CGV 연인석 자리였던 셈이다. 참고로 우리 동 아파트에는 몇몇 세대만이 베란다가 있다. 우리 집에는 베란다가 있어 환기하기 좋은, 선택받은 집이라고 자부해왔다. 베란다는 집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두 번째 출입구이기도 하다. 어느 곳보다도 보안이 중요한 공간에 취약점이 발견된 것이다. 


"또, 왔네요. ㅎㅎㅎ 이건 분명 두 놈일거예요."

 

며칠 뒤 우리 집 공동관리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허탈한 웃음 너머로 슥삭 거리는 빗질 소리가 들렸다. 그는 또다시 다녀간 비둘기 손님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갑작스러운 추가방문이었다. 지난 2년간은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윗집에 세 들어 살다가 2년 만기를 채우고 나온 것일까. 아니면 엄마 비둘기와 분가라도 한 것인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방문을 지속하니 서둘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편은 전직 프로그래머로서 보안 취약점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그는 전화 중에 이미 비둘기 퇴치용품을 구매했고 로켓을 타고 오고 있다고 전했다. 통화를 마치고 검색창을 켰다. '비둘' 두 글자만 입력했는데 두 번째 자동완성 키워드로 '비둘기 퇴치'가 뜬다. 얼마나 많은 베란다에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었단 말인가.



베란다 주인 마음씨가 고와서 다행이다


"여보, 베란다에 비둘기 그거.. 설치했어요?"


"아, 그거.. 반품했어요. 삼다수로 해결해보려고요."


남편이 비둘기 퇴치용품을 반품했다. 퇴치용품 설치 방법을 찾던 중, 설치물에 상처 입은 비둘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도저히 설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발과 다리를 다쳐 거동이 어려워지기 쉽다고 설명을 더했다. 베란다 주인이 베푼 자비에 박수를 보냈다. 대신 창고에 보관 중인 2L 삼다수 페트병을 꺼내 베란다 조명 위에 올렸다. 1L가량 수돗물을 채워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 옛날 마을 입구에 세워두던 목장승처럼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심미적으로 최고의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이다. 또 다른 공동관리자로서 다른 대안을 찾기 전까지는 내 마음속으로 페트병을 투명하게 만들어 버텨볼 요량이다. 그때까지 페트병 장승들이 우리 집 베란다를 잘 지켜주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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