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집에 있다가 없다가 했다. 어떤 날은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누워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아빠는 집에 없었다. 이런 날이 반복된 것은 아빠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수차례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의처증에서 시작된 아빠의 증세는 폭력과 환시, 환청으로까지 번졌다. 칼춤을 출 때는 광기 어린 눈빛이었고, 환시나 환청이 들릴 때는 자꾸 무언가가 구석에서 말을 한다고 했다. 귀를 틀어막을 때도 있었고, 벌벌 떨 때도 있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는 아빠는 거대한 사람인데, 육중한 몸을 휘적휘적거릴 때마다 어딘가 부딪히지는 않을까 굉장히 초조했다.
그때 당시는 정신과에 대한 개념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어있지 않을 시기였다. 때문에 정신과에 입원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가두어서 또 다른 제3의 생명체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아빠를 정신과에 보냈다. 엄마는 주치의에게 아빠의 증세를 매번 설명하고, 끊임없이 입원을 시켰다. 단 한 번도 퇴원을 시킨 적은 없다.
정신과에 입원을 하면 환자 단독 동의로는 퇴원을 할 수가 없다. 꼭 보호자의 서명이 필요한데, 매번 퇴원 동의를 한 사람은 할머니 었다. 아빠는 정신과에 입원해서 자신은 멀쩡하고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난동을 피웠다. 간호사들에게 잡혀가기 일쑤였고 안정제를 맞고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면회를 가 아빠의 상황을 본 할머니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아들은 멀쩡해, 저 년이 내 아들을 정신병자로 만들어서 가두고 있어' 할머니와 엄마의 날카로운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계속 할머니를 설득해야만 했다. 아들을 똑바로 봐야 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오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다. 할머니는 현실을 부정하고, 계속 아들을 퇴원시켰다. 집에는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가 없고 나와 동생들은 어린이집에 보내졌다. 집에 방치된 아빠의 증세가 점차 심각해지자 자신 아들은 살려야겠는지 입원을 허락했다.
결국 아빠는 그때 당시는 정신분열증, 현재는 조현증이라고 불리는 병명을 진단받았다. 입원을 하여 각종 검사를 받았고 MRI 뇌사진에서 아빠의 전두엽은 검게 죽어있었다. 이미 고장 나버린 뇌가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 병원의 주치의가 아빠와 굉장히 잘 맞는 사람이었다. 의사는 아빠에게 각종 항정신약을 처방하면서 경과를 지켜봤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아빠를 진료했다. 몇 년 후 아빠에게 딱 맞는 약을 발견하게 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게되었다.
엄마의 결단력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아빠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려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살아오더니 우리를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아빠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 병으로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신과에 입원시키면서 엄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으로서의 역할로 돌아올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으로서 구실만 하도록 전 인류애를 발휘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