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조용해졌다. 집에서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녔는데, 겉으로 보았을 때는 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만 멍해 보이거나 계속 잠을 자거나 했을 뿐. 어떠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집에서 깨지는 소리나 남성의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일이 없어져 다행이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방이 좁아 안방에서 다 같이 잘 수 없는 환경이 되자 6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분리 수면에 들어갔다. 엄마는 나에게 '이제 다 컸으니까 작은 방에서 혼자 잘 수 있지?' 하는 말과 함께 작은 요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천장에는 야광스티커를 많이 붙여주었다. 처음 혼자 자는 날 어떤 심정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방에 문을 닫지 못했던 것과 야광 스티커를 보면서 '그래 혼자 잘 수 있어!' 하는 주문만 남아있다.
그 작은 방에서 수도 없이 울었다. 혹여나 안방에 들릴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많이 울었다. 어린 내 눈으로 봐도 아빠는 정상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지내다 보니 친구들의 엄마 아빠가 보였다. 나도 친구들처럼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과자를 사 왔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엄마의 혼이 나고 싶었다. 지금이야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빠가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나도 엄마 아빠를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날마다 아빠의 병을 고쳐달라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별빛신 달빛신 해님 등등 아는 신에게 빌고 빌었다. 무릎을 꿇고 빌 때도 있었고 누워서 손을 모아 기도한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아빠는 인간으로서만 존재했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점점 비교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니 괴로워졌다. 그 나이는 초등학교 2학년, 9살이었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야 하는데 정말 가기 싫었다. 그 무렵 엄마는 직장 일로 늦게 퇴근하는 날이 잦았고, 집에는 멍한 아빠만이 있을 뿐이었다.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면 의자를 책상에 올리고 자기 자리를 청소하는 것이 하루의 끝이었다. 청소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친구들이 다 가고 난 이후에도 그들의 자리까지 다시 청소할 정도였다. 사실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청소를 한 것이다. 단 몇 분이라도 늦게 가고 싶어서.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우리ㅇㅇ이, 청소를 잘한다. 다들 본받아 볼까요?'하고 말했다.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안 그래도 집에 가기 싫었는데 청소를 더욱 열심히 할 구실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열과 성을 다하여 청소를 했다. 그러다 보니 청소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땀을 뻘뻘 흘리기까지 했다. 친구들이 다 가고 난 뒤 선생님이 조용히 내 곁에 와서 이야기했다. '이제 그만 청소해도 돼. ㅇㅇ이가 집에 가고 싶을 때 가도 되니까 앉아있다가 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내가 집에 가기 싫어서 청소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말없이 빗자루를 놓고 내 자리 책상에 조용히 앉았다.
그렇게 몇 달을 선생님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어떠한 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간간히 간식을 챙겨줄 뿐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 앞에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열심히 작성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일기장을 살펴보기도 했고, 채점을 하기도 했다. 그저 내 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지켜보거나 책을 읽다가 잠을 자거나 했다. 하루는 엄마가 일찍 퇴근했는지 초등학교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가려고 교문을 나섰는데 엄마와 마주쳤다. 왜 이렇게 늦게 끝났냐는 추긍에 나는 청소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때는 학기마다 상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공부를 잘한 친구들에게는 최우수상, 우수상, 특별상 같이 상장을 수여했다. 공부를 못했던 내가 그 해에 처음 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봉사상'
그 선생님께 너무도 감사하다. 집에 가지 않는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그저 자리에 앉아있어도 된다고 이야기해 준 것이. 나에게 이유를 물었다면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집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 아빠가 정상이 아님을 말한다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일과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 우리 집의 상황은 상처이자 치부였다. 선생님은 내 성향을 파악하셨던 걸까. 나에게 이유를 묻는 대신 봉사상을 만들어 어른의 따뜻한 칭찬으로 감싸주었다.
커서 생각하니 선생님은 사실 나와 함께 있어준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 업무용 컴퓨터로 효율적으로 일을 마치고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교실에 남아 집에 가지 않는 나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것이다. 한 번씩 과자를 챙겨주면서. 그때 먹었던 과자들은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나에게 첫 번째 참된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