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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은 Aug 02. 2024

용기는 고통을 먹고 산다,  북한산 백운대 등반

유혹의 허망함

자연이 매 순간 새롭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듯

세상일도 끊임없이 변하고 힘든 만큼 만족이 있다.

주말마다 몸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아직 힘이 있을 때 북한산 백운대를 정복하기로 했다.

아내가 준비해 준 김밥과 오이 등을 가방에 담아

큰 아이랑 함께 전철을 타고 구파발역 북한산 입구에서 내렸다.

구파발역에서 북한산 올라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산행하는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북한산 입구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과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나는 경지가 좋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가 너무 좋아 "멋지다"를 연발하면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 촬영도 하면서 정상을 향해 걸었다.     

아이랑 서로 밀어주고 의지하면서 백운대 돌계단을 끊어질 듯 끊어질듯한 숨을 이어 가면서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정상에 올랐다.

바위정상에 올라 서울시내 전경을 바라보면서

챙겨 온 김밥과 오이를 먹고 한참을 머물다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예쁜 여자 한분이 제가 산을 혼자 왔는데

"혹시 하산을 같이 해도 될까요" 물어와 흔쾌히 "그렇게 하시죠"라고 했다.  

원래 나는 바로 직진으로 하산 하려고 했었는데

그녀가 산 중턱 길로 내려가는 길이 무릎에 안전하다고 권유해

안전한 길로 돌아 돌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계곡에 발을 식혀 가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아침에 올라갔던 산행이 저녁 시간이 되어서 내려왔다.

대략 7시간을 걸었다.

산 입구에 내려와 그녀와 칼국수 집에 들러

맛나게 저녁을 먹고

다음 산행에서 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왕이면 본능에 충실하고 긍정적으로 살자는 생각으로...

     

병원행 개봉 박두,

집에 도착 후 등산이 몸에 무리가 되었는지

다리에 계속 쥐가 나고 경련이 일어나

가족들이 종아리를 주물러 주고 족욕도 했지만

오랫동안 오른쪽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한의원에 가서 일주일 정도 침을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고

열이 나고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인근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 의사가 다리 상태가 심각하다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좋다고 소견서를 내어 주었다.

잠시 내 몸에 대해서 잊고 있다가

드디어 내가 큰일을 냈구나 느꼈다.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에서 바로 입원 결정을 내렸고

6명의 의사 선생님 협진이 결정되었다.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뻔했다고

감염원인이 무엇인지 계속 조사를 했다.

나는 주말마다 산행을 한 것 밖에 없다고 했다.

산에 가서 모기에 물렸는지, 벌에 쏘였는지,

뭔가 다리에 감염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염될만한 것이 없었다.

혈액내과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에 찾아와

이야기를 하다가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어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그렇지요  선생님은 몸에 면역력이 약해서

침을 맞으면 안 되는데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감염의 원인을 침으로 확정했다.

다리를 절개하고 염증을 2주 동안 빼냈다.     

마취를 하는 수술이지만 염증을 제거하는 동안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쓰리고 아파 간호사와 아내에게 투정을 부렸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에피소드가 있는데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나타나지 않아 한잠을 기다렸다.

왜 빨리 오지 않고 늦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내는 "하루종일 걱정이 되어서 아무것도 못 먹어

배가 너무 고파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보호자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술 통증으로 죽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아내가 하는 말이다.

"당신이 죽는 줄 알았다. 수술이 잘 되어 마치에서 깨어났다고 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너무 배가 고파 식당으로 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는 가지만 그 당시 나는 아내의 행동에 너무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수치를 정상으로 맞춰가면서 치료를 했다.

너무 엄청난 실수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처음으로 감염내과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입원 기간 동안에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장애인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면 보호자도 힘들지만

환자도 너무 불편하다.

서울성모병원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덕분에 무사히 치료를 잘 받고 퇴원해서 지금은 잘 살아가고 있다.

가족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며, 아내가 있기에 내 생명의 영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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