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이 주는 고통
아주 오래전, 아주 오랫동안 미워했던 친구가 있다. 17살에 만났던 그 아이를 나는 왜 21살이 될 때까지 미워했을까. 심지어 만날 일이 전혀 없던 때에도 가끔씩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열렬히 미워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중학교 시절이 지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은 설레면서도 무척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지금은 더 심하다고 하지만 그때도 남녀 학생 비율이 불균형해서 여학생은 12명, 남학생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그리고 나는 반에서 유일한 한 씨라서 마지막 번호, 12번이었다. 그리고 1번이었던 그 아이. 중성의 느낌인 내 이름과는 달리 그 아이는 어여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여학생 12명 중에 2명은 육상부 학생들이라서 오후 수업에는 여학생이 열 명뿐이었다. 난 늘 인싸가 되고 싶은 관종이라서 반 전체, 특히 소수의 여학생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 아이는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볼살은 뽀얬고, 웃을 때는 두 볼을 발그레 붉히며 한쪽에 보조개를 만들었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운동장을 바라보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먼저 말을 붙였다. '친하게 지내자, 너는 얼굴이 참 귀엽다'라고 칭찬을 해가며.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는 것에 적극적인 아이였고, 그때까지 내가 만난 친구들은 모두 마음이 말랑말랑한 아이들뿐이었다.
한 학기가 다 끝나갈 때에도 나는 결국 그 아이와 친해지지 못했다. 그 아이는 딱 한 명 친해진 아이와 둘이서만 붙어 다녔다. 분명 왕따라고 하기엔 그 아이가 나머지 우리와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 속마음을 공유해야만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철없는 나이였고, 그래서 늘 숨기는 게 많아 보이는 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여럿에게 미움을 샀다. ‘이유 없이 싫은 애', 나는 그 아이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지나고 우리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해야 할 한 가지 이유가 더 늘어났다. 그 아이가 내가 좋아하던 남학생과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말이 많고 그것에 반비례해서 비밀이 적은 나는 그 아이가 무척 얄미웠다. 조용히 존재하며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 아이를 나는 마음 깊숙이 미워했다.
나의 미움에 대해 그 아이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 아이를 미워하다가, 졸업하고 그 아이와 마주 칠일이 없을 때에도 나는 2년을 더 미워했다.
나의 미움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왜 나는 계속 보이지도 않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미워하고 고통받았을까. 미움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그 아이를 싫어하면서 ‘이유가 없다’는 이유를 붙인 것은 그 이유가 스스로 생각해도 타당하지 않기에 그랬던 것이다. 나와 달라서, 나의 열린 마음이 거절당한 기분이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사귀어서 (그마저 다 오래 전의 일인데도) 나는 그 아이를 미워했다. 미움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미워할 때는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며 더 이상 미워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 나는 미움을 멈췄다. 그리고 미워하지 않는 일은 그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미움을 멈추는 일은 미움의 대상과의 화해나 외부와의 소통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소통으로 풀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고 나만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나를 설득하고 이해하는 일.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나서부터는 실용적이지 않은 미움은 마음에 품지 않으려 한다.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은 때도 많지만, 쓸모가 있는 감정인지를 검토하는 일은 늘 내 정신건강을 위해 중요하다.
오래전 내 인생에서 가장 미워했던 그 아이. 아주 가끔은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포동포동한 볼살에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그 아이가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를, (나보다는 아니지만) 행복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