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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사귄 전여친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자리에

by 미쓰한

"가장 오랫동안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몇 년 만나셨어요?"


남자들을 만나면 흔히 지난 연애가 대화의 단골 주제가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질문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내가 예전에 만났던 사람과 6년 연애를 했다는 말에 어떤 남자는 "헉, 그럼 거의 사실혼 관계 아닌가요?"라고 반응했다. 나는 약간 어이가 없어서 "사실혼이라는 말의 정의가 저랑은 좀 많이 다르신 듯..?" 하고 대답했다.


오랜 연애를 했던 과거가 누군가의 눈에는 흠이 될 수도 있다. '내 애인의 과거'를 몹시 의식하는 사람들을 보면 박완서의 소설 '그 여자네 집'이 생각난다. 마을에서 소문난 한쌍이었던 곱단과 만득은 일제 침략을 배경으로 헤어지고, 만득은 순애와 결혼을 한다. 순애는 영정사진 속에서도 짙은 화장을 한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곱단을 의식하며 생을 마감한다. '순애'형 인간이라면 애초에 내 애인의 과거이야기는 차단하는 것이 좋겠다. 피차 괴로울테니.. 그러나 주로 사람들은 "제가 연애를 하면 좀 오래 하는 편이라서요."라며 진득한 성품을 자랑하듯 말한다. 실제로 몇 개월 만에 헤어졌던 연애들로 채워진 과거는 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기도 한다.


전에 만났던 U는 전 여자 친구와 11년 동안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나는 원체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고 듣는 것을 좋아하기에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U는 전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그 과정에서 서로 평생 함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별했다고 했다. 그들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11년이면 엄청난 기간이기도 하고 무척 많은 추억이 있겠네요" 상수역의 어느 일식 꼬치집에 마주 앉아 내가 말했다. U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걷다 보면 다 그 사람이랑 다녔던 곳이에요, 여기도 다." U의 표정은 부동산 직원이 집 주변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무미건조해 보였다.


"한 2, 3년 지나면 다 똑같지 않나요? 그 뒤로는 4년, 5년.. 그냥 둘 사이는 똑같은 상태로 흘러가는 거 같던데?" U가 덧붙여 말했다.


그런가? 어쨌든 결말이 있는 연애였으니 하는 말이겠지만, 어쩌면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길어진 연애 기간이 둘 사이를 더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의 연애 자아는 연애가 끝나야지만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슷한 상태로 몇 년을 이어갈 뿐이었고, 그 때문에 몇 년을 만나든 상관없이 늘 비슷한 문제로 싸웠다. 헤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때 비로소 나는 변화되어있었다. 심지어 새로운 애인 앞에서는 전에 만나던 애인이 그토록 원하던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27살에 시작한 연애가 32살에 끝났을 때, 내 연애 자아는 27살에 멈춰있었다. 처음 겪는 30대 연애였다. '20대에 충분히 지독한 이별을 경험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서툴게 30대의 연애시대에 진입했다.


내가 U에게 호감을 표했을때 그는 분명 반가워했다. 그러나 내가 가벼워 보였던 걸까? 그가 가볍고 싶었던 걸까? 아직 한 사람과의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11년의 세월을 강조하면서, 자유롭게 연애하고 싶다고 깃털처럼 말했다.


진득한 세월이 끝나자마자 만남과 헤어짐을 쉽게 여기는 그를 보며, 서투른 나는 쉽게 놀랐던 것 같다. 나처럼 그도 연애 자아가 멈춰있던 게 아닐까? 지난 11년을 빠르게 캐치업하기 위한 가벼움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벼운 그는 어디까지 갔을까? 꽤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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