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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an 07. 2022

딸의 '망한 연애스토리'를 읽는 아빠

내 연애의 민낯을 아빠가 읽을 때

극단적으로 새벽형 인간인 우리 아빠는 새벽 세시쯤 활동을 시작한다. 내가 목격한 바로 아빠의 새벽 활동이라는 것은 주로 독서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은 내가 독서모임 사람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하자, 아빠가 책상에 앉아 '죽은 혼'이라는 러시아 문학을 읽고 있었다. 그다음 주에도 내가 어김없이 모임 사람들과 술을 먹고 세시에 들어오자, 아빠도 어김없이 사무라이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 나는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다.) 아빠는 내게 '이제 왔느냐' 하시고 바로 돌아앉아 일본 전국시대로 다시 빠져들었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며 알량하게나마 작가라는 명칭을 이름 뒤에 붙이고 난 후로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단연 아빠였다. 아빠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랬다. 조그만 문집을 하나를 내고 공저로 내 이름이 작게 쓰인 책을 건네었을 때도 아빠는 그것을 꽤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빠는 새벽에 만나든 대낮에 만나든 '한 작가, 한 작가'하고 나를 불렀다.


'무슨 글을 써?'하고 처음 아빠가 물었을 때, 나는 '틴더에서 만난 남자들에 대해 써요.' 혹은 '내 망한 연애스토리에 대해 써요'라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틴더로 글을 쓴다'라고 말해서 선입견을 만드는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부모에게 내 연애의 민낯을 보이는 것에 대한 민망함, 아빠의 기대와 응원에 부응하지 못하는 주제가 아닐까 하는 부담감(러시아 문학에 버금가는 글이나 사무라이에 관한 글을 쓰지는 못할 테니), '남'의 망한 연애가 아니라 '내 딸'의 망한 연애는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아빠에게 내 첫 책을 선물했다. (나의 첫 독립출판물이 될 '30대 연애 표류기'의 가제본, 세상에 단 세 권 존재한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아~~ 무책이나 재미있으면 그냥 읽어!'라고 말하곤 하셨다. 읽어서 나쁜 책은 세상에 없다는 말, 그 말은 책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책을 써낼 때도 꽤나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어쩐지 여전히 쑥스러워 얼굴을 보지도 않고 투기하듯 아빠품에 내 책을 넘기고 몇 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세상에 세권뿐인 책을 완독한 아빠의 서평이 어떨지 용기 내어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시차가 꽤 있던 우리는 그날 둘이서만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다. 우리는 청요리를 배달시켰고 각자의 주종으로 술잔에 술도 채웠다.


"아빠 내 책 다 읽었어?" 괜히 나는 아빠의 대답보다도 젓가락질에 더 집중하는 척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아빠도 "어어..? 어어.." 하며 아직 다 못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낮에 있던 일에 대해 대화 주제를 급히 돌려버렸다. 나도 머쓱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또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주였다.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이모 댁에 가시고 식탁에서 아빠가 저녁을 혼자 드시고 계셨다. 아빠는 '한 작가~'하고 나를 부르며 사실 내 글을 다 읽었다고 결심하듯 말하셨다. "그런데 아빠가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어."


왜 가끔 부모는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할까. 그것은 내가 부모가 되어봐야만 알게 될까. 고통의 대부분이 글 속에서 희화화될 만큼 나는 단단해졌고 그만큼이나 성장했는데, 아빠는 왜 그 의도를 몰라주고 속상해하느냐 말이다. 아마 며칠 전 언니의 헤어짐에 아빠가 속이 상해서 하는 말이겠지. (언니가 결혼하는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은 좀 충격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우리의 고통은 연결되어있고, 연결되어있다고 느낄 때마다 어쩌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나는 괜찮은데 아빠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이다'라는 언니의 말과 '우리는 괜찮은데 니 언니가 너무 마음 아파하는 거 아니냐'라는 엄마의 말이 서로 상충되어서 결국 서로 괜찮지 않은 것처럼.


역시 그럼에도 나는 아빠가 언제나 나의 첫 독자가 되어주면 좋겠다. 아빠가 나를 계속 '한 작가, 한 작가' 하고 불러주는 것이 좋아서.


"아빠, 내 고통은 아빠 탓이 아니지만, 내 글쓰기와 책 쓰기는 아빠 덕이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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