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한 Mar 30. 2022

'그게 손절할 이유가 되냐'고 묻는 친구에게

오늘도 공감에 마음을 쓴다.

한때 공감이 세상을 구한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을 진짜 연결해주는 건 공감뿐이라고.


나 같은 ENFP는 고개가 늘 가로 운동보다는 세로 운동을 하고(무한 끄덕끄덕), '아,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라는 문장은 하루에 열두 번 정도 사용한다. (그리고는 스무 번 정도 스스로 줏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감을 하는 것과 받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본래 나로부터 확장되어서 다른 이들도 나처럼 공감해주리라는 기대를 일단 품게 되는데, 당연히 그러한 기대가 늘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중학교 친구와 연을 끊은 적이 있었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덜 마른빨래를 입고 출근한 것처럼 찝찝함을 주는 친구였는데도, 함께 지내온 세월이나 공유하는 기억들은 나를 종종 매몰비용에 집착하는 투자자처럼 만들곤 했다. 때문에 이따금 연락이 오면 적절히 손절하지 못하고 그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꾸준히 후회를 했다. 그리고 (예견했지만 피하지 못하고) 그 친구 때문에 크게 화가 나던 날에는, 적립해둔 찝찝함에 분노를 추가해서 장문의 카톡을 쏟아내고 연을 끊었다. 그날 이후 이틀은 악몽을 꾸었지만, 역시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A를 오랜만에 만났다. 일 년 반 만에 서로의 근황을 묻던 중, 한 친구와 손절했다는 내 근황을 A에게 털어놨다. A는 손절 이유에 대해 물었고 나는 하소연하듯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게 손절까지 할 이유가 돼?"


공감이 아니라 대충의 호응이었더라도 자연스러운 대화라고 생각했을텐데, 예상치 못한 A의 질문에 나는 적잖이 당황해버렸다. A의 반응에 의하면 나는 작은 이유로 오랜친구와 손절하는 옹졸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순간 말문이 막혀서 변명할 새도 없이 우리의 대화는 멀리 그 주제를 떠나있었다.


불어에는 '계단의 재치(Esprit de l‘escalier)'라는 말이 있다. 단상위에서는 생각나지 않던 재치있는 말이 계단을 다 내려오고나서야 생각이 나서 '아~이렇게 말할껄~'하고 후회하는 현상을 말한다. 난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A에게 다시 변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트럭은 된다. 그 당시 내 상황에 대해, 그 친구의 오래된 민폐에 대해, 손절 이후 내 친구관계가 더 쾌적해진것에 대해.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꾸준히 글을 쓰고있는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공을 들이고 정리해서 변명을 쏟아내기위해. 자세하고 솔직하게 쓰는 내 글의 원동력은, 그리하여 공감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공감에 마음쓰는 일은 합리화가 대부분이지만 역시 쓰고나면 달라진다. 맹목적으로 공감을 추구하는 것보다 결국 내 마음의 위치를 잘 확인하고 안심하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A가 공감하지 못해도 글속에 나는 후회가 없다.


아마 공감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건 공감 이외에 많은 것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감은 나를 구했고, 또 구할것이다. 내가 계속 글을 쓰는 한.


공감하시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망한 연애스토리'를 읽는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