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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선 Sep 23. 2024

04화 : 운명이 부른 우연 (2/2)

새벽부터 비가 미친 듯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4시가 좀 넘어갈 때쯤 점심 스케줄의 요리사들이 하나둘씩 퇴근을 했고 존과 멜빈은 설거지를 마저 끝낸 후 구석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가드망제 스테이션 오늘 총 2명 아닌가? 한 명이 안 보이는데 누가 안온 건가.”


(가드망제 garde manager : 불을 쓰지 않은 차가운 음식을 만드는 스테이션. 애피타이저, 카나페를 다룸.)


셰프 요노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로하스가 아직 안 왔습니다, 솊"


“연락해 보았나?”


“아니…”


“아 그래서 자넨 자네 일 안 하고 무작정 앞뒤 없이 가드망제 프랩을 도와줘?”


“아닙니다, 솊”


“저녁 스케줄 가드망제 팀 출근 시간이 3시인데 1시간이 지났네. 정말인지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당장 전화해.”


“너 어디니?”


“셰프님 저 아파서…”


셰프 요노는 수셰프의 핸드폰을 가로채더니 그 대신 대답했다.


“자네 오늘부로 해고일세. 끊겠네.”


주방에는 정적이 흘렀다. 긴장감 도는 그 재미있는 장면을 눈앞에 두고도 주방 안에 존과 멜빈을 제외한 모두가 마치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각자 바빴다. 셰프 요노는 씩씩 거리며 존에게 물었다.


“자네 오늘 퇴근 시간이 몇 시인가?”


“저 6시입니다.”


“할 일, 뭐 남았나?”


“다이닝 룸 청소…”


“자네 오늘 스케줄 하나 더 해보겠는가?”


“네! 솊!"


“한 시간 안에 다이닝룸 청소 끝내고 옷 새로 갈아입고 내 사무실로 오게. 한 시간 안에 와야 하네.”


“네! 솊!”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지원한 존에게는 초과 근무처럼 반가운 소식도 없었다. 모두가 존을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수근거렸다. 십분 전 누군가 전화 한 통으로 해고 통지를 받을 때는 남일처럼 관심조차 갖지 않던 요리사들이었다.



멜빈은 본인이 마무리하겠다며 존에게 가보라고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존의 발걸음엔 이유 없는 설렘과 무거움이 공존했다. 락커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며 계산했다.


‘2,4,6 시간… 여섯 시간 초과수당!’


스무 살 청년의 존은 일을 더 하는 것에 짜증 내는 대신 돈을 더 벌어서 신나 하던 열정 가득하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셰프님.”


“어 들어와. 다름이 아니라 자네 혹시 요리해본 적 있는가?”


“아니요.”


“해보겠는가?”


“네? 제가요? 아니 그니까.... 할게요 제가.”


긴장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평생 집에서도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던지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존, 도와주기로 해줘서 너무 고마워.”


2주 전, 가드망제 꼬미로 들어온 제이는 울어 퉁퉁 불어 터진 얼굴로 존에게 말했다.


(꼬미 commis : 라인쿡 중 가장 낮은 레벨의 요리사.)


“아니야. 뭐 하면 될까?.”


“일단 내가 프랩은 다 끝내둬서 지금 할 일은 딱히 없는데 30분 후부터는 엄청 바빠질 거야. 일단 내가 가드망제 메뉴들부터 알려줄게. 이 어두운 녹색 접시에는 관자 크루도, 차콜색 접시에는 숭어 타르타르, 그리고 저기 갈색 접시 위에는 방어 요리가 올라갈 거야. 내가 세 가지 요리 모두 만들어서 플레이팅 하는 것까지 보여줄게.”


제이의 작은 손은 빨랐고 섬세했다.

소금을 뿌리던 엄지와 검지부터 그녀의 손 끝이 닿는 모든 것의 끝은 예술이 있었다.

아름다웠다.


관자에 검은색 가루를 올리며 지윤은 존을 한번 보더니 말했다.


“사실은 요즘 같은 여름이 이런 동남아 레스토랑 애피타이저 메뉴 뽑기가 젤 쉽고 맛있어. 그리고 지금 내가 뿌리는 이 검정 가루는 소금이야.”


“이게 소금이라고?”


“이름은 라바 솔트. 먹어볼래?”


제이는 존의 손바닥 위에 검정 소금을 한 꼬집 올려주었다. 존은 혀에 소금을 올리고는 쩝쩝거렸다.


“어우 짜!”


제이는 존을 보며 약간의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말했다.


“먹지 말고 느껴봐. 혀에 두고 녹이면서 눈을 감아.”


존은 손바닥에 남은 소금을 혀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매우 짰다. 그런데 소금이 혀에 다 녹아 없어질 때쯤, 은은하게 훈제 향이 느껴지던 것이었다.


“어! 소금에서 베이컨 맛이 나는데?”


“맞아. 라바 솔트의 매력. 그리 강한 훈제 향까지는 아니지만 은은한 풍미를 갖고 있어서 차가운 해산물 요리에 정말 잘 어울려.”


“신기하다.”


평생 간을 맞추는 용도라고만 생각했던 소금이 한 두 종류가 아니라는 것. 맛과 식감 그리고 쓰임까지 다르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셰프 요노 오피스에 쿡북 많은데 셰프님이 허락 안 받고 읽어도 된다고 했으니깐 가서 읽어봐. 더 재미있는 거 많아.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얼떨결에 철 수세미와 세제 대신 칼과 트위저를 잡게 되었던 그날 이후, 조나단은 매일 아침 2시간 일찍 출근했다. 도착하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쿡북으로 가득한 셰프 요노의 사무실로 홀린듯이 들어갔다.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책장의 제일 윗부분에 꽂힌 책부터 차례대로 읽어 나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모든 내용과 요리 과정, 그리고 완성된 음식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요리는 기술이라고 하나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술 행위였다.


조나단에게 쿡북은 레시피 책 그 이상이었다.


친구들과 클럽에 가고 파티를 하는 것보다 더 중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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