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부서진 자아의 노래
바다에 갔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파도는 발목을 분지를 기세로 거칠게 휘감으며 쇄도해 왔다가도 금세 낯빛을 바꾸어 언제 그랬냐는듯 미소 지으며 유유히 되돌아 흘러나갔다.
억겁의 세월을 건너온 그 오래된 운동이 반복될 때마다 내가 딛고 선 발 아래의 모래더미는 하염없이 깎여나갈 뿐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버텼으나 무수히 명멸하는 물거품들을 마주하자니 절로 아찔하고 고독했다. 어쩌면 세상에는 어떠한 기준도, 구심점도, 가치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유물론적 무의미의 가능성을, 바다는 매번의 크고작은 외침을 통해 나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 간 편의점 음식, 캡슐 속에 든 각종 약물, 좁아터진 스마트폰의 사각 화면, 낯선 이들과의 부질없는 인사치레, 고작해야 수백만원 단위의 수입 따위에 길들여진 내 허름한 영혼은 바다를 마주하자마자 곧장 압도되었다. 어떠한 판단이나 대응에 임할 겨를조차 없었다. 천적과 조우한 산짐승처럼, 개장수와 맞닥뜨린 시골의 똥개처럼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분뇨를 쏟아내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리고야 말았다.
내가 기대어 밥을 벌고, 스스로 조직하여 사유의 근거로 삼고, 나름대로 언어화하여 지켜오던 모든 관념의 체계와 구조물들은 원시 본연의 바다 앞에 한 줌 타고 남은 재만도 못한 허상이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시시콜콜 늘어지는 철학적 논증의 방식이 아닌, 바다 자체의 광막함에 휩쓸려 흡수당한 채, 그 존재의 심연을 직관하는 단 한 번의 번쩍이는 깨달음이었다.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문학적 플롯의 형태가 아닌, 거의 멍이 들도록 얼얼하게 온몸을 후려치는 정신적 충격으로서 획득되는 가열찬 깨달음이었다.
인간의 생활과 문명을 이루는 요소들 중 바다 앞에 무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다를 설명하려는 뭇 종교의 신화들은 실로 빈곤한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조수간만의 운동을 기술하는 몇 가지 미분방정식도 그 거대한 실체 앞에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객관성과 탐구심이 결여된 이삼류 문필가의 언어에는 애초부터 바다를 이야기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었다.
대관절 바다 앞에 인간이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음식과 옷가지가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결혼과 사랑이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추상과 논리가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기쁨과 절망이 다 무엇이다냐?
바다 앞에 부모와 형제가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탐, 진, 치가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온갖 악덕이 다 무엇이더냐?
바다 앞에 의로움과 희생과 봉사는 또 무엇이더냐?
인간의 언어와 바다의 실재 사이에는 영영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끝모를 어둠이 가로놓여 있었다. 인간들이 오로지 저들끼리만 복작대려 빚어놓은 아스팔트 범벅의 땅으로 돌아온 오늘까지도, 바다의 소리나 냄새, 영상이나 규모 따위를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곤혹스럽고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