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에 핀 꽃은 화이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날의 공기를 더듬거려 본다. 그러자 한 장면이 기억의 수면 위로 부표처럼 떠오른다. 배경은 프라하 공항. 자정 무렵의 어두컴컴한 밤공기가 내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기띠를 포대기 삼아 아이를 등에 업고 흔들리는 눈으로 익숙한 실루엣을 찾고 있다. 그 순간, 나만큼이나 수척해진 얼굴로 하얀 꽃을 한 아름 안고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떨어져 지낸 수개월 동안 오늘의 재회를 몇 번이고 상상했었는데... 역시 머릿속 그림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현실에서 마주한 우리의 재회는 단 한 구석도 드라마틱하지 못했다. 굳이 장르를 정하자면 드라마보다는 짠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기억의 시간을 되감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재회는 단 한 구석도
드라마틱하지 못했다
인천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3시간 가량을 날아오는 동안 시차도 그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른 새벽인데 네덜란드는 늦은 오후쯤 되었다. 나도 아이도 비몽사몽인데 눈앞의 세상은 온통 붉은 노을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입국장은 왜 그렇게 넓은지 게이트까지 가는 길이 천 리 쯤은 돼 보였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는데 먼저 와 있던 중년의 한국 남성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선뜻 자리를 내어 주었다.
도움의 손길은 기내에서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옆좌석에 앉은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한테 이런 말이 실례일 수 있지만 솔직한 느낌이 그랬다. 여자인 나보다 예쁜 유럽 남자가 옆에 앉았는데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다. 좌석 간의 간격이 좁다 보니 아이가 몸부림을 치다 그만 그 남자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얼른 아이의 발을 손으로 움켜쥐며 사과했는데 손사래를 치며 연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첫 여정이었던 13시간 비행보다, 마냥 시간을 때워야 했던 3시간 남짓한 스톱 오버보다, 마지막 2시간이 가장 지치고 괴로웠다. 그럼에도 시간은 지나갔고 위기마다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프라하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으려면 아기를 뒤로 업어야만 했는데 아기띠로 혼자 업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없이, 옆에 있는 그 이쁘장한 유럽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내 아이에게 여러번 발길질을 당해 내심 불쾌했을 텐데, 그런 내색없이 흔쾌히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흠.. 여기에서 아름답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온통 붉은 노을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를 업고 주섬주섬 짐을 챙긴 후에야 답답한 기내를 간신히 벗어났는데 무슨 일인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같이 내린 다른 승객들 중에 나와 같은 외국인들은 하나 둘씩 행렬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출국장 한쪽 벽면에 일렬로 배치된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가서 앉았다. 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인천공항 출국 전에 남편이 메일로 보내줬던 서류 뭉치를 들이밀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기내에서 승무원이 작성하라고 한 서류를 제출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 그렇다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그들은 규정대로 따랐을 뿐인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울분이 터져 나왔다. 원망이 가득 찬 얼굴로 모니터를 쏘아보며 그들이 하라는 대로 입국을 위한 설문을 마친 나는 온갖 짜증을 담아 인쇄 버튼을 꾸욱 눌러 다시 들이밀었다. 정말이지 단전에서부터 욕이 차오를 대로 차올랐다. 누구에게라도 육두문자를 퍼붓고픈 심정이었다. 피곤에 지쳐 분노를 키우는 사이, 다른 승객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했고 나와 내 등에 업힌 아이. 그리고 주인을 찾지 못한 낯익은 수화물들이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뭐랄까. 뭐라 말할 수 없이 서글프고 처량했다.
그래. 그래서였을까. 그토록 그리웠던 남편을 만났지만 내겐 눈물 한 방울 떨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내 등에는 울다 지쳐 잠든 아이가 흘러내릴 듯 위태롭게 업혀 있었고 나는 안간힘으로 아이 아빠가 있는 곳까지 무거운 걸음을 뗐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인천공항에서 아이의 팔꿈치가 빠져 병원까지 다녀왔다는 비보를 들은 남편은 우리를 기다리는 내내 울었다고 했다. 그동안 꾹 참고 눌러왔던 감정의 봇물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날에서야 깨달았다. 때로는 요란한 말보다 무거운 침묵이 더 많은 메시지를 준다는 걸.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그럴듯한 눈물의 포옹도 진한 입맞춤도 없었지만 눈빛만으로 모든 게 절절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다시 만나게 돼서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도. 그렇게 조용한 재회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남편이었다.
남편: 자, 여기! 자기 주려고 환영의 꽃다발을 준비했어.
뭐가 좀 엉성하지? 포장은 내가 직접 한 거야.
나: 자기가? 고마워... 근데 애부터 좀 받아줘.
이게 현실 부부의 대화가 아닐까. 남편이 꽃을 준비한 것까진 좋았는데 길게 대화할 상황이 못됐다. 아기띠를 풀어헤치자 잠들었던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졸린 눈으로 내 등에서 벗어난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밝아졌다. “아빠~ 아~빠!!”
이제껏 고생하며 업고 온 엄마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뭐지? 아주 잠깐 그런 마음이 스쳤지만 부자 간의 상봉을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겨우 23개월 인생에서 6개월이나 떨어져 있던 아빠인데 용케도 잊지 않고 만나자마자 온사랑을 쏟아붓는 아이. 우리의 만남을 극적으로 만든 건 몹쓸 코로나도 힘든 여정도 아니었다. 나와 남편을 반반씩 닮은 우리의 재간둥이. 이 아이를 함께 보듬으며 남녀를 넘어선 부모의 이름으로 애끓는 뜨거운 가족애를 함께 나눴다.
우리의 상봉을 극적으로 만든 건
사랑스러운 우리의 재간둥이
4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 봄이라고 하기엔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시린 밤공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내 마음에 담긴 프라하의 첫인상은 온통 검은빛이었다.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 도시도 밤의 장막을 드리우니 이리도 쓸쓸하구나’ 싶었다.
그날 밤, 불구덩이에서 막 빠져나온 듯이 새까맣게 탄 내 속을 비춘 건 까를교의 야경이 아니라 남편이 수줍게 내민 이름 모를 흰 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결하게 피어있는 하얀 꽃송이들을 보니 이런 말이 하고팠다.
나도 너희처럼 이곳에서
다시 순백의 꽃을 피우리
그렇지만, 오늘은 좀 이해해 줄래?
딱 오늘까지만 조금 더 시들어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