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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 우리집이 있다니

여보, 근데 왜 한숨이 나올까

by 조수필

우리의 첫 집이었던 신혼집은 아담한 만큼 아늑했다.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변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키재기를 하듯 들어서 있는데 뒤늦게 가세한 새 아파트들에 비하면 우리의 울타리는 고참 중에서도 최고참 계열이었다. 나이 많은 아파트라 손 가는 곳이 많긴 했지만 세대수도 많고 소위 말하는 ‘초품아’인 데다 나름 번화가에 있어서 신혼 라이프를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이를 테면, 차로 5분 만에 심야영화를 즐긴다거나 편한 차림으로 밤 산책을 하다가 입이 궁금해지면 먹자골목에서 순대와 떡볶이를 집어 먹으며 둘만의 소소한 행복을 만끽했다. 물론, 달달한 신혼의 맛은 유통기한이 있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9개월이었다.




달달한 신혼의 맛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기면서 우리 부부의 신혼집은 새 식구의 첫 보금자리로 빠르게 변해갔다. 신혼살림에 맞춰 준비한 혼수들은 점점 쓸모를 잃어갔고 결혼선물로 받은 아기자기한 장식품들 역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뭐, 그런 게 무슨 대수일까. 중요한 건 우리 사이에서 축복 같은 생명이 태어났고 그로 인해 삶의 구심점이 바뀌었다는 거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남편과 나는 이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겠노라 굳게 다짐했고 그 다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내 실행에 옮겨졌다.





나: 여보, 여기가 우리집이야?

남편: 응, 어때? 사진으로 본 그대로지?



그랬다. 나는 우리의 두 번째 집을 사진으로 먼저 만났다. 서너 장 밖에 안 되는 사진을 마르고 닳도록 넘기면서 ‘침대는 어디에 놓을까’, ‘냉장고 자리가 애매하네’, ‘현관에 신발장은 원래 없는 건가?’ 혼자 별의별 궁리를 다하며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춰 나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가상 이사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한들 현실에서 완벽히 적용되긴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삿짐보다 몇 주나 늦게 이 집에 들어온 나의 첫 느낌은.. 한 마디로 ‘오~마이 갓!!’



남편: 왜 그래? 집이 마음에 안 들어?

나: 휴.. 그게 아니라, 애 보면서 이 많은 짐을

언제 다 정리할까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네

남편: 힘들게 정리를 뭣하러 해

그냥 대충 넣어두고 쓰면 안 돼?



안되고 말고지. 정리가 불필요한 소모전이라면 왜 다들 신박하게 정리하려고 공을 들이겠는가. 아무튼 그날부터 시차 적응이고 뭐고 집에 콕 박혀서 작업을 시작했다. 24시 독박육아전을 치르는 와중에도 기회만 생기면 보기 싫게 쌓여있는 이삿짐 더미를 걷어냈다. 평일 한밤중엔 남편과 아이가 잠든 틈에 혼맥, 아니 노동주를 마시면서 시간 외 근무를 자진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결될 양이 아니었다. 벼르고 벼르면서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두 남자를 놀이터나 공원으로 쫓아 보낸 후에야 겨우겨우 남은 숙제를 마칠 수 있었다.




정리가 불필요한 소모전이라면
왜 다들 신박하게 정리하려 공을 들일까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쓸고 닦으며 새 둥지에 정을 붙이고 살다 보니 어느새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거슬리지 않을 수준은 된 것 같다. 하긴. 세상에 완벽한 게 있기나 할까. 아무리 반짝반짝 광을 내 보아도 더럽혀지는 건 한순간이다. ‘말도 안 돼! 체코에 우리집이 있다니!’ 그림 같은 집을 꿈꾸며 이곳으로 날아왔지만 내가 기대했던 그런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이 있을 곳은

누군가의 마음뿐이다.”



좋아하는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한 말인데 여기에 오고 나서 꽤 오래 이 말을 곱씹었다. 내가 살아갈 곳은 이 낯선 나라도 아니고 생경한 구조의 체코식 아파트도 아니다. 내가 머무를 곳은 오직 우리 가족의 마음속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집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녘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날에는 거실 창가로 나가 나만의 은밀한 시간을 갖곤 하는데..

푸른 밤과 붉은 아침이 맞교대를 하는 그 찰나를 훔쳐보며 ‘오늘 내 마음의 집은 안녕한가’ 이렇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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