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가 된 보물단지
싱글이었던 20대의 마지막 겨울, 맡고 있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고 캐나다 밴쿠버로 날아갔다. 생애 첫 장거리 비행이자 혼자서 하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 후로는 남편과 허니문으로 떠난 스페인행이 두 번째로 고됐다. 허니문이니까 휴양지를 택할까 하다가 "아냐, 이때 아니면 언제 유럽에 가보겠어"라는 식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마드리드 in, 바르셀로나 out]으로 코스를 짜고 둘이서 스페인을 휘젓고 다녔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생애 세 번째 장거리 비행이 이렇게 연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울산에서 김포, 김포에서 인천, 인천에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 공항까지...! 다시 생각해도 숨이 조여 온다. 어떻게 하면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울산에서 프라하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4월의 마지막 토요일로 항공편이 정해진 후로는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고 수를 놓아 봐도 명쾌한 답이 떨어지질 않았다. 믿을 거라고는 아기띠와 분유, 그리고 나 자신이 전부였다.
진부한 표현 중에 '엄마는 위대하다', '죽을힘을 다하면 못할 게 없다'라고 했는데 나는 더 이상 이런 말들을 진부하다는 말로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지켜내야 할 생명체가 있다는 건, 그 생명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건... 나를 넘어서는 사명임에 분명하다. 모든 일을 뒤로하고 캐나다로 떠났던 '혼자의 나'는 나약하고 미숙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더 이상 나약하지도 마냥 미숙할 수도 없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모성애도 자란다
전에 없이 비장한 엄마의 기류를 느꼈는지 아이는 평소답지 않게 순한 어린양이 되었다. 뜻밖에도, 말썽은 아이가 아니라 캐리어가 부렸다. 매장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온라인 쇼핑으로 급하게 산 기내용 캐리어가 문제였다. 이번 비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것이기에 겉보기엔 멀쩡했는데 경유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때 쯤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승무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캐리어를 바닥에 내렸다. 비행기를 옮겨 타기 전에, 기내에서 썼던 아이의 젖병과 옷가지들을 정리해서 넣으려고 보니 '세상에... 이게 뭐야!!'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확히 양쪽 지퍼 모두 망가져 있었다. 탑승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에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징조가 있었는데 아이를 챙기느라 놓쳤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가 깨기 전에, 비행기가 암스테르담 활주로에 닿기 전에 어떻게든 말썽쟁이 캐리어를 수습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억지로 몇 번 당겨보다가 '아니지.. 이러다가 지퍼단이 다 찢어지기라도 하면?' 이런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멀쩡한 캐리어도 아이를 안은 채로 끌고 다니기 버거운 판에 이 상황에서 안에 든 짐들이 모조리 쏟아지기라도 하면? '으악~~~~' 정말 생각만으로도 괴로웠다.
망가진 가방을 바닥에 눕혀놓고 끙끙대고 있었는데 오며 가며 승객들을 살피던 승무원들이 나를 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급한 나는 아랑곳없이 캐리어의 지퍼를 움켜쥐고 소리 없는 싸움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댄 후에야 손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물론 고장난 지퍼는 끝내 고치지 못했다. 그저 당장 터지지 않길 기도하며 임시방편으로 만져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캐리어에 돌릴 수는 없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인터넷으로 급하게 주문한 것도 나였고, 하나라도 더 챙겨볼 요량으로 좁은 캐리어에 짐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도 나니까. 하지만 아무리 나 자신을 탓하려 해 봐도 차오르는 눈물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무게가 15kg이나 나가는 튼실한 아들을 품에 안고 기내를 빠져나갔다. 한 손은 아이 등에, 또 한 손으로는 언제 어디에서 내용물을 뱉어낼지 모를 고장난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암스테르담의 공기를 들이켰다. "후~~~ 하~~~~" 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 봐도 가슴에 턱 하니 걸려있는 바윗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뭘 어쩌겠는가. 성가시기만 한 감정은 개나 줘 버려야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먼저 내린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나보다 두 배쯤은 커 보이는 네덜란드 직원들이 검색대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줄이 짧아질 때마다 무언가 잘못한 학생처럼 주눅이 들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도래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힘 좋게 생긴 암스테르담 공항 직원들도 내 캐리어의 구제불능 지퍼를 열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직원: Hey, where did you buy?
this is not working
이 가방 어디서 샀죠?
지퍼가 고장 났네요
나: of course I know but… you know?
that is a new one! ㅠㅠ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가방 새로 장만한 거예요
웃프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슬픈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엄한 얼굴로 검색대 앞에 서서 여유롭게 수다를 떨며 나를 내려다보던 거구의 공항 직원도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망가진 애물단지를 돌려주었다. 이런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캐리어는 최종 목적지인 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귀중품들을 뱉어내지 않고 용케 잘 버텨주었다. 좁은 기내에서 터진 캐리어를 보며 사색이 된 얼굴을 하게 하지도 않았고, 공항 대리석 위에 와다다다~ 내용물을 쏟아내 부끄럽게 만들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 누구나 지나간 일에는 관대해지는 법이니까. 그저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얻었다고.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한 고통만 준다고. 그냥 이렇게 웃어넘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