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안 살아야지 했는데…’
자식을 향한 모정에 국적은 없겠지. 다만, 키우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유럽 엄마들이 포대기를 하고 있는 건 상상이 안되니까. 한국에서는 그 흔한 아기띠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기들은 개월 수를 불문하고 유모차에 누워있다. 어떤 엄마들은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다른 손으로는 반려견의 목줄을 당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얼굴엔 여유가 넘쳐흐른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어느 날 내가 포대기로 아이를 들쳐업고 집 앞을 배회한다면.. 오가다 만난 체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하긴 하다.
계절마다 출근룩으로 한두 벌 씩 장만했던 옷들은 급격히 쓸모를 잃어가고 있다. 대신, 앞치마의 개수가 늘었고 집에서 입는 평상복에 점점 신경이 쓰인다. 동이 트면 침대에서 걸어 나와 주방 서랍에 있는 앞치마를 꺼내 허리춤에 두른다. 요즘 나의 유니폼이다. 벌겋게 김치물이 튄 자국은 아무리 빨아도 개운하지가 않다. 늘어난 홈웨어에 얼룩덜룩한 천 자락을 질끈 동여매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아이 낮잠 시간이 되면 포대기를 찾아 나선다. 포대기. 나의 또 다른 출근룩이다. 오늘도 24시 독박 육아가 시작됐다.
만약 한 번이라도 이런 말을 내 입 밖으로 꺼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치기 어린 마음에 속으로만 읊조렸던 문장인데 이렇게 글로 옮기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뭘 안다고 감히 이런 생각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할 권리가 있나?!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가 아니면 모두가 타인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린 친밀하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니까.
나의 미래, 나의 우상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인 그녀는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첫 딸인 나를 낳아 온 청춘을 바쳤다. 어떻게 20대를 내던질 수가 있지? 어떻게 청춘을 포기할 수가 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로운데 그 후로 지금까지 무려 40년이다. 한 평생 자식들의 그늘에서 자유를 강탈당했다. 마흔 언저리에 막내를 낳고 환갑이 된 이날 이때까지 새끼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올해 초까지 원고를 써냈던 라디오 방송은 요일별로 고정 출연자가 정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금요일마다 명화를 소개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덕에 이 그림과 연이 닿았다. 한국 미술사의 거장인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두 여인>은 1962년에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우리 엄마가 1963년생이니까 한 살 터울인 셈이다. 엄마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날 내 마음에 저장해 놓은 또 하나의 그림이 겹쳐진다.
내가 대학생일 때 핏덩이였던 막둥이. 그 녀석이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마음을 들쑤시는 일화가 있는데 그때 우리 엄마의 나이가 마흔한 살 쯤 됐으려나. 어린 막내를 업고 장에 나가면 채소장수 할머니들이 "아이고메~ 등에 짊어진 게 쌀가마니라도 저래 이고 지고 하겠나. 자식이니까 죽을 동 살 동~ 업고 댕기는기라" 하셨단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지가 벌써 17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또렷한 걸 보면, 어린 마음에 꽤나 깊이 각인이 됐나 보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런 고약한 생각으로 엄마의 고단함을 애써 외면했다. 변명거리는 많았다. 없는 형편에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이었다. 내 밑으로 동생이 줄줄이 넷. 그 무게감을 이기려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 씩 뛰었다. 그렇다 한들.. 내 젊은 시절이 엄마의 삶보다 버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난, 내 미래를 위해 어떤 고생도 감내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아슬한 외나무다리 위에서 안간힘으로 서 있었다. '참자. 아이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 할 때까지만 버텨내자' 하는 심정으로.
업어 키운 딸이
어느덧
아기 엄마가 되었네
거친 동해바다가 낳은 강원도의 딸이 내 엄마라서 일까. 나도 딸이지만 여느 집 딸들 같은 살가움이 내겐 좀 머쓱하다. 그럼에도 해외로 나오고부턴 통화가 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바쁜 딸을 대신해 돌봤던 어린 손자를 애틋해하는 마음. 그 키운 정을 알기에 틈이 날 때마다 한국으로 영상통화를 건다. 그날도 전화기 화면 너머로 아이를 비춰주고 있었는데 "뭐야? 아직도 포대기 하는 거야?"라고 재차 묻는 엄마. "응, 매일은 아니고 가끔."이라고 짧게 매듭 지으려 했으나 "이제 애 무게가 얼만데~ 그러다 허리 다칠라” 하며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인다.
엄마가 말한 대로 갈수록 아이를 업는 게 힘에 부친다. 어느덧 두 돌이 지난 아이는 16kg에 이르렀다. 웬만해선 꺼내지 않으려 하지만 잠이 오면서도 더 놀고 싶어 울고 보챌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는 수없이 옷장 한 귀퉁이에 넣어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 아이를 등에 포옥 싸맨다. 그럼 언제 보챘냐는 듯 이내 스르륵 눈을 감는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발바닥이 저릿해 오지만 내 등에 업힌 채 곤히 잠든 천사를 보면 그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내린다.
아마 엄마도 그랬겠지. 울엄마는 오남매를 키우며 그 모진 세월을 기꺼이 견뎌냈는데 나는 왜.. 하나 키우는 것도 이렇게 힘에 겨울까. '엄마처럼 안 살아야지..' 했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난 엄마처럼 살고 싶어도 그럴 재간이 없는 거였다.
결혼에 대해 뭘 안다고.
육아에 대해 뭘 안다고.
그저 버텨내야만 하는
한 여자의 인생에 대해
내가 뭘 아는 게 있다고..
어린 날의 철딱서니는
이제와 이렇게, 뒤늦은 고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