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오스트라바 (About Ostrava)
작년 이맘때였다. 그날도 전속력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후 2시부터 진행하는 라디오 생방송을 목전에 두고 한창 원고 작업에 몰두해 있는데 지이이이잉~징징~ 작가실의 적막을 깨는 전화 진동벨 소리가 귓전에서 울려 퍼졌다.
남편: 바쁘지? 잠시 통화 돼?
오늘 확실히 발령이 났는데... 러시아는 아니야
나: 응? 러시아가 아니라고? 그럼 어딘데??
남편: 음... 체코!
여담이지만 정식으로 주재원 발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전혀 다른 쪽으로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러시아 북서부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인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동안 김칫국을 들이켰는데 뜬금없이 체코라고? "잠깐만...! 그럼 우리 프라하에서 사는 거야? 꺄오~~" 이렇게 또 한 번 설레발을 치는 내게 남편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서울에서 살게?" 그 말에 갑자기 힘이 쭈욱 빠졌다. 그다음 대사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낭만의 도시, 프라하가 아니라면 어디인들 무슨 소용이람.
시무룩한 마음에 어디든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내심 새로운 환경에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지난 봄부터 생활하게 된 이 도시는 ‘오스트라바’로 불린다. 한마디로 ‘체코의 울산’ 같은 느낌이다. 자연과 공업의 균형을 맞추려는 울산과 오스트라바. 그런 점에서 두 도시는 참 많이 닮았다.
수도인 프라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매력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집 근처에 공원이 많다는 점이 남다른 호감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공세권에 살려면 집값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여기는 어딜 가나 나무가 우거져 있다. '여기가 공원이야? 숲이야?'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울창한 공원길을 거닐다 보면 뜻밖의 선물을 받는 날도 있다.
고단한 하루를
감미롭게 안아준
숲 속의 멜로디
어스름한 저녁이면 샛노란 불빛으로 사방을 밝히는 시청 옆 공원 맥주집은 어느새 우리의 방앗간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 초원을 뛰놀다가 갈증이 나면 그곳부터 생각이 난다. 크림맛이 나는 묵직한 맥주 거품의 유혹을 당해낼 수가 없다. 공기가 제법 서늘한 날에는 따뜻한 라떼를 손에 쥐고 잠깐의 여유를 맛보기도 한다. 그렇게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서다가 우연히 숲 속의 음악회를 만난 적이 있다. 무성한 나무들이 거대한 스피커가 되어 공원 전체에 바이올린 선율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어떤 유명 연주회보다 깊고 진한 울림으로 남았다.
터널이 길수록
햇빛은 눈부시다
봉쇄령. 말만 들어도 숨이 조여 온다.
나보다 반년 먼저 체코 생활을 시작한 남편의 말로는 암흑, 그 자체라고 했다. 생필품을 파는 최소한의 가게들만 영업을 이어가고 나머지 상점들은 일제히 문을 걸어 잠갔다. 거리에는 휑하니 낙엽만 굴러다닐 뿐,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체코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이 도시의 두 얼굴을 모두 만난 남편은 온도차를 크게 느끼고 있다. "뭐야! 광장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 "우와~ 이 쇼핑몰에 이런 매장도 있었어?" 하며 흠칫 놀라기 일쑤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와 아이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봉쇄령이 풀렸다. 코로나19로 침체돼 있던 회색빛 도시에 생기가 돌자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다시 맨 얼굴을 드러냈다.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부 차원에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백신 접종률 상승에 따른 정책 변화인 듯 하다. 물론 실내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체코는 조심스럽게나마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아이들 핑계로 어른들이 더 즐거운 동물원도 다시 문을 열었고, 남편이 내내 눈독 들이고 있던 축구경기장도 불이 번쩍번쩍하다. 이번 여름, 오스트라바의 아이들은 낮이면 호숫가에 있는 워터파크에서 물놀이를 즐겼고 밤에는 풀벌레가 우는 숲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캠핑의 추억도 만들었다.
그 틈에 끼어 우리 세 식구도 마음의 빗장을 풀고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다.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살아온 정서까지 뭐 하나 같은 게 없지만.. 그럼에도 우린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동시대의 희로애락을 함께 겪어내고 있으니까. 이런 관계라면 ‘이웃사촌’까지는 아니어도 ‘이웃동지’ 쯤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