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빨간 지붕에 숨어
수빈은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렐교 한복판에 서 있다. 길이가 520m에 달할 만큼 장엄한 대교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 거리를 지나는 이는, 수빈을 포함해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고요하고 허허롭다. 쓸쓸하고 황량하다. 겨울의 정수를 껴안은 카렐교는 사무치게 애잔하다. 구시가지에서 프라하성으로 이어지는 물 위의 통로. 14세기에서 21세기를 잇는 세월의 가교. 유구한 역사가 깃든 이 다리에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다. 무언가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이를테면 비장함 같은 것.
‘어쩌면 카렐교는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터무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수빈은 사고를 멈출 수가 없었다. 상상이 갈망으로 깊어지는 날에는 꿈속에서도 이 길을 거닐었다. 아득하게 아름다운 카렐교를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깨어난 아침에는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아프기도 했다. 어쩌면 육신이 먼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오늘, 이곳에 서 있을 수빈의 모습을.
'이렇게 추운 곳인지 그때는 왜 몰랐을까.'
변한 건 이곳이 아니라 수빈의 계절이다. 프라하의 겨울은 줄곧 그래왔듯이 올해도 그저 예년만큼 춥다. 만물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한파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다리도 강물도 인간의 마음까지도, 영향권 안에 있는 건 뭐든, 먼지 한 톨도 남김없이 모조리 얼려버릴 기세다. 이럴 때마다 수빈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체감한다. 자연이 하는 일. 그 힘 앞에 그저 납작 엎드린 한낱 인간.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개 미물임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TV건 라디오건 채널만 돌렸다 하면 아우성이다. 아마도 오늘이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 될 거라고 입을 모은다. 체코어에는 젬병이지만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유럽계 방송인들의 격앙된 목소리라든지, 과한 표정이라든지, 한껏 움츠러뜨린 어깨라든지, 하는 것들. 때로는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제스처가 더 확실한 언어가 되기도 하는 법. 아무튼 수빈은 지금의 상태가 꽤 만족스럽다. 그녀에게 주어진 오늘은, 듣고 싶지 않은 말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결과니까. 그렇다고 마음까지 춥지 않은 건 아니다. 새벽녘에 찾아본 기상예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오후 네 시를 지나는 현재 기온은 영하 9도까지 떨어졌을 것이다. 각오도 했고 무장도 했다. 나름대로는 제법 껴입었다 싶었는데 채비가 허술했던 걸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온몸이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사방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에 겹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건... 밖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불고 있다.
5월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녹일 듯이 영롱하게 쏟아지던 햇살과 바람직하게 푸르던 하늘빛. 그의 품처럼 따스하던 공기의 농도까지, 그날은 생애 가장 완벽한 봄날이었다. 카렐교의 상징인 열여섯 개의 아치.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던 블타바 강의 고혹한 자태와 그 위에 누워있던 몇 척의 유람선. 그 모든 생김이 지나치리만큼 또렷한데. 여전히 눈이 부시게 생생한데... 완전무결한 줄로만 알았던 그림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생겨버렸다.
이별은 수빈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잃는 것이며 사람을 떼어내는 것보다 괴로운 건 추억이 무너지는 일이라는 걸, 수빈도 이제는 안다. 끝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가 떠난 후로 한동안은 잊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한데, 기억이라는 건 그런 거였다. 부정하려 애를 쓸수록 도망치려 발버둥을 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죄악 같은 것. 과거가 잔인한 이유는 생채기를 낸 순간들은 점점 옅어지고 달콤한 기억들은 되려 더 짙게 미화되기 때문이라고, 수빈은 그렇게 체념하고 있다.
“우리 신혼여행 말이야. 여기로 오길 잘한 것 같아. 현실에서 비현실로 순간 이동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꿈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는 마치 살아있는 동화 같아.”
3년 전, 같은 자리에 서서 수빈이 쏟아냈던 말들이다. 미소 어린 얼굴로 흐뭇하게 들어주던 그는 허니문에 걸맞은 다짐 섞인 말들을 돌려주었다.
“결혼 10주년 되면 또 올까? 아니다. 그건 너무 머니까... 5주년 괜찮네. 우리 5년 뒤에 꼭 다시 오자. 어때?”
그날의 우리. 그날의 환희. 그날의 약속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그와 함께 나눈 모든 것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허공으로 증발되고 말았다. 수빈이 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는 모습을 꺼져가는 눈으로 지켜만 보았다. 그대로 돌이 되어도 상관없겠다 싶은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성실히 흘러, 가을에서 다시 겨울로 물들던 어느 날, 수빈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존재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흔적을 지우고 떠나왔다.
“이제야 정말로 혼자가 된 기분이야.”
잔잔한 강물을 향해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속삭이는 그녀. 수중에 남은 건 쓸모를 잃은 추억뿐이다. 한 줌의 미련도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마저도 남김없이 덜어내야 한다. 기필코 그래야만 한다. 머리로는 충분히 받아들였는데... 말썽을 부리는 건 언제나 마음이다. 이번에도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망연히 있을 수는 없다. 함께한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 없다면 1인분의 몫만 남기고 싶다. 다시 혼자가 되었으니, 다시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이 겨울, 수빈이 프라하에서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