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빨간 지붕에 숨어
짜라랑. 찬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좁은 골목을 휘감을 때마다 문밖에 걸어둔 은색 풍경이 방정맞게 춤을 춘다. 물고기 모양을 한, 제법 커다란 종을 달아놓았음에도, 해국은 때때로 그 소리를 놓칠 때가 있다. 틈만 나면 혼자만의 늪에 빠지는 해국은 이곳이 일터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평온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식당을 깨우는 건 대부분 지호의 몫이다.
“음음!”
인기척에 흠칫한 해국이, 방문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입을 뗀다.
“안녕하... 아! dobry den~”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지호는, 상황이 재밌다는 듯 느닷없이 손님 행세를 하며 짓궂은 표정으로 일갈한다.
“거, 주인장! 젊은 양반이 어디다 정신을 팔기에 손님이 들어오는 줄도 모릅니까? 예?”
긴장으로 살짝 경직됐던 해국의 표정이 지호가 떠는 너스레에 보기 좋게 풀리고 있다.
“형을 놀려 먹으니 재밌냐?”
지호가 배시시 웃는다. 껄껄거릴 때마다 표 나게 드러나는 목젖. 우람한 체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왜소한 편도 아니어서 적당히 보기 좋은 다부진 어깨. 왼쪽 목덜미에 푸른색으로 그려 넣은 작은 새 그림 타투. 아무런 무늬도 없는 헐렁한 티셔츠에 와이드핏 면바지까지 올블랙 착장으로 편안함을 더한 자유로운 영혼. 유지호가 흰색 운동화에 욱여넣은 큼직한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카운터 앞자리에 있는 상석으로 다가가더니, 의자 하나를 슬며시 빼며 말을 잇는다.
“오늘 점심땐 손님 좀 있었어? 설마 또 공친 건 아니지?”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꼬아 올리고 비스듬히 앉아서는, 의자 등받이에 오른팔을 맡긴 지호가 부릅뜬 눈으로 빈 테이블들을 훑으며 단골 멘트를 날리자, 해국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쏘아붙인다.
“야! 너! 내가 그 질문 금지라고 했지?
넌 애가 기억력이 나쁜 거냐, 인성이 나쁜 거냐?”
애써 평정을 유지해 온 해국의 감정선이 일순간 뒤틀리고 만다. 이럴 때마다 불쑥 나타나는 과거의 한 장면은, 그렇잖아도 시끄러운 마음을 더욱 신명나게 헤집어놓는다. 공무원증을 반납하고 뒤돌아서던 그날의 복잡하고 다단했던 심경이 이역만리까지 쫓아와 집요하게도 못살게 구는 것이다. 끈질긴 기억의 단편은 꼭 주방 선반에 줄 세워놓은 양념들 같다. 어떤 날은 소금처럼 짜고, 어떤 날은 고춧가루처럼 맵다. 해국을 그런 상태로 밀어 넣는 것도 그곳에서 끌어내는 것도 지호뿐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형!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잖아. 까놓고. 이 황량한 땅덩이에서 형 걱정해 줄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냐고. 안 그래?”
해국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는 대신, 조용히 내면 속으로 가라앉는 선택을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녀석이 진짜 동생이면 좋겠다고. 험한 세상에 이런 피붙이 하나만 있으면 그래도 버틸 만하겠다고. 하지만 차마 이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그저 말뿐인 농이라 해도 육성으로 옮겨 담는 순간, 어렵게 잠재운 지난날의 감정들이 뜨거운 액체를 타고 홍수처럼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귀소본능이 탑재된 인간으로 살면서 뿌리를 잃은 채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녀석에게는 아무리 말해주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꺼내지 못한 말들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냥 그렇게 꺼내지 않은 채로, 입안에 잠시 머금다 몰래 삼키기로 한다.
“너, 가! 너 때문에 올 손님도 안 오는 거잖아. 나가, 얼른!”
겨울이라 그런 걸까. 타국이라 그런 걸까. 속수무책으로 나약해진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면 야속하긴 해도 이게 최선이다. 눈치도 없이 입바른 소리만 골라서 하는 녀석과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자신을 격리하는 것. 코로나19가 알려준 그것. 거리 두기를 시전한다.
“아니 이런 식으로 손님을 푸대접하는 게 어디 있어!
형! 나도 손님이라니까.”
졸지에 물 한잔도 못 얻어먹고 박대를 당한 지호가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중인데, 해국은 조금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어차피 혼자이지만 지금은 더 능동적으로 혼자이고 싶기에, 굳게 걸어 잠근 문을 당장은 열 의지가 없다. 그렇게 5분. 그렇게 10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고리를 잡고 뒷짐을 진 채로 한참을 벌서듯 서 있었던 해국이 천천히 몸을 돌려 밖을 본다.
"휴,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소란스러웠던 주위가 잠잠해진 걸 보니 지호가 돌아간 모양이다. 짧은 독백으로 숨을 고른 해국은, 카운터 안쪽 선반에 가지런히 접어두었던 겨자색 카디건 스웨터를 꺼내고 있다. 앞섶을 단정히 여미고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갑게 에인다. 그 바람에 왼쪽 눈언저리가 격하게 일그러지는데, 꽤 쌀쌀하긴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골목 어귀까지 걸어 나간다. 저벅저벅. 해국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묵직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정감을 주는 소리가 난다. 적당히 닳은 신발의 밑창이 지표면과 부딪히는 소리. 저벅저벅. 세상의 끈을 잃어버린 청년이 또 다른 탯줄을 찾아 태동하는 소리. 그렇게 스무 발자국 정도 멀어지니 ‘Maminka’라 적힌 간판이 한눈에 담긴다. ‘마민카’는 체코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간판에 새긴 글씨가 묘하게 생경하다. 마민카. 엄마... 멀찌감치 떨어져서 식당을 바라보는 해국의 눈빛이 그윽하게 무겁다. 그런 그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옆 가게 사장님, 에블린. 둘의 대화가 시작됐다.
“뭘 그렇게 봐? 간판이 뭐가 잘못됐어?”
예고 없이 들어온 에블린의 개입이 해국의 생각을 정지시켰다. 당황한 해국은 연신 손사래를 치며 표정을 감춘다. 다 큰 청년이 엄마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이렇게 난감할 때는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어디 다녀오세요?”
에블린도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큰 눈을 한번 꿈뻑이며 능숙하게 다음 말을 받는다.
“해질 때 되니까 출출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잠깐 가게문 닫아놓고 길 건너 빵집에 가서 콜라체 몇 개 사 왔지. 먹어 볼래?”
콜라체는 체코인들이 즐겨 먹는 전통빵이다. 아주 작은 동네 빵집에도 있을 만큼 대중적인 간식이다. 과일과 견과류로 속을 채우고 치즈를 듬뿍 뿌려서 만드는데 레시피가 간단해서 집에서도 쉽게 구울 수 있다. 물론 집집마다 만드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지만 어떻게 만들어도 맛은 고만고만하다. 해국은 에블린이 건넨 콜라체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로 고맙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엄마 뻘 되는 그녀가, 그녀의 세탁소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크게 한 입 베어 본다.
“음~ 이래서 단 것도 좀 먹어야 한다니까."
고작 빵 한입에 기분이 슬며시 나아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진다.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실은 '고작' 빵 하나가 아닌 거라고. 실로 엄청난 위로를 받은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자 남은 빵을 더 맛있게 먹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나머지는 식당으로 돌아가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으려 아껴두기로 한다. 마음이 동하자 걸음도 한결 빨라졌다. 다시 가게 앞에 선 해국. 어떤 결의를 품은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로 나직한 음성을 퍼뜨린다.
“잘 부탁해.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뿐이야.”
짜랑짜그랑. 길게 늘어진 풍경이 답이라도 건네듯 또 한 번 바람에 나부낀다. 차갑지만 경쾌한 리듬이 묘한 안정감을 주는 소리. 해국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입구에 놓인 세 개의 돌계단을 하나씩 딛고 올라선다. 그러자, 180cm인 해국보다도 두 뼘 정도는 더 키가 큰 담갈색 나무문이 장승처럼 서서 앞을 가로막는다. 마치 어떤 세계와 세계를 분리하기 위해, 그런 막중한 임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굳건하게. 엄숙하고도 충직하게. 문은 단지 문일 뿐인 데도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문을 열어서일까. 장수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것처럼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만 그런 게 아니라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겨울을 건너서 봄으로 온 것처럼 따스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나 바뀌다니. 마땅한 일임에도 새퉁스럽게 기이하다는 생각을, 해국은 입었던 외투와 함께 벗어둔다. 그리고 그 옆에 내려놓은 빵 하나. 애블린에게서 받아온 콜라체를 보니 아까부터 떠올렸던 커피 한 모금이 더욱 간절해진다. 무슨 원두가 좋을까, 하고 즐거운 고민을 하며 커피머신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또다시 요란한 풍경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야! 너, 형이 오늘은 그냥 가라고...”
당연히 지호겠거니, 하고 쏟아낸 말인데 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제야 꺼림칙함을 느낀 해국이 주방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추고 휙하니 돌아본다.
“아... 저기... 벌써 영업이 끝났나요?”
지호가 아니다. 얼핏 또래로 보이는 한국 여성이 못 올 곳에 온 건가, 하는 얼굴로 멀뚱히 서서는 맞은편에 선 해국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눈처럼 희고 겨울나무처럼 창백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