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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Feb 10. 2023

#3. 겨울에 온 손님

소설 연재/  빨간 지붕에 숨어

새하얀 수성페인트를 칠해놓은 벽면에는 해국이 직접 찍은 흑백사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걸려있다. 어림잡아 예닐곱 장은 돼 보인다. 입구를 들어섰을 때의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면, 오른쪽 벽면의 가장자리를 차지한 스틸컷이 첫 번째 작품이 되는데, 지름 1.5cm의 검은 테두리를 두른 심플한 액자. 그 속에는 프라하 구시가지의 풍경이 멋스럽게 담겨있다. B4용지만 한 인화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달리는 노면전차다. 유럽의 낭만을 상징하는 트램트레인(tram-train). 그 차창마다 눈꽃무늬 LED가 장식된 걸로 보아 사진 속의 계절도 겨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리창의 반 이상을 가린 조명 사이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유러피안 남성, 이 대목이 씬스틸러다. 엉덩이를 어정쩡하게 빼고 있는 폼으로 봐서는 서려는 건지 앉으려는 건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 흔들리는 전차의 긴박함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덥수룩하게 기른 오렌지색 턱수염을 태연히 쓸어내리고 있는 사내의 왼손. 그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수빈이 감상평 같은 말을 읊조린다.


“묘하게 끌리는 사진이네.”


한 걸음 뒤에서 메뉴판을 들고 서 있던 해국이 이때다, 하고 끼어든다.


“본 투 비 여유에서 나오는 유러피안 특유의 멋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순간포착 카메라에 대응하는 허세라고 봐야 할까요?”


그제야 자신이 음식은 주문도 않고 사진에 빠져있다는 걸 알아차린 수빈이 겸연쩍은지 못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죄송해요. 저야말로 여유를 부렸네요. 그거, 저 주시는 거죠?”


메뉴판을 내밀던 손을 거두고 다시 수빈을 올려다보는 해국. 창가 자리에 놓인 원형 테이블로 가벼운 눈짓을 보내며 뒤엣말을 잇는다.


“그보다...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 아니죠?”


수빈은 그럴 리가 있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해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옮긴다. 식당 주인이 골라준 자리로 가서, 의자를 빼려고 몸을 살짝 숙이는데, 그 찰나에, 왼쪽 어깨에 아슬하게 걸려 있던 베이지색 토트백이 툭하고 떨어진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빈은 이럴 때마다 작은 해방감을 느낀다. 가방은 시작에 불과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카멜색 롱코트를 벗는 동안에는 갑옷이 떨어져나가는 상상을 한다. 비단 코트에서 끝나지 않는다. 목에 두른 회색 머플러까지 완전히 풀어헤친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신세라는 게 자못 못마땅하면서도 실없이 웃음이 난다. 세상 한파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꽁꽁 동여매어 보지만 그래봤자 눈사람인데... 어차피 얼음덩어리에 불과한데... 종국에는 녹아 없어질 걸 알면서도 목도리나 장갑 따위에 의존하는 눈사람. 자신이 꼭 그런 처지인 것만 같아서 수빈은 자꾸만 헛웃음이 난다. 그래도 오늘은, 최악은 면했다. 추위와 옷더미에 짓눌린 채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운 좋게 발견한 이 식당이, 이 작은 공간이, 꽁꽁 얼어있던 수빈의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녹여주고 있으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메뉴랄 게 없어요. 실은 개업한 지 얼마 안 돼서요. 아직 손볼 게 많네요."


수빈이 메뉴를 살피는 동안, 초보 사장인 해국은 궁색한 변을 늘어놓느라 진땀을 뺀다.  


"어쩐지. 그랬구나. 이 골목이요, 제가 자주 오던 길인데 여긴 처음 본다 했거든요."


관심을 보이는 수빈에게, 해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답을 꺼낸다.


"이제 보름 정도 됐어요. 홍보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후... 처음이라 미숙한 것 투성입니다."


단이 낮은 흰색 스니커즈 위로 카키색 면바지와 별다른 프린팅이 없는 베이지색 상의를 받쳐 입은 해국. 수수한 듯 맵시 있는 외모와 달리 소탈한 말투로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그가, 그의 인상이, 수빈은 살짝 당황스럽다. ‘Maminka’라 적힌 무채색 앞치마를 허리춤에 두르지 않았다면, 해국이 이 식당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수빈은 속으로 생각한다.  


“제가 별소릴 다하죠. 음식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아! 메뉴!"


수빈은 해국의 말이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가, 이제야 메뉴판을 펼치고 있다. 해국이 손수 적은 듯한 정갈한 글씨들 속에서 단어 하나를 입술로 길어, 공기 중에 퍼뜨린다.


"음... 마민카 정식으로 할게요."


수빈이 마민카 정식을 고른 데에는 부연으로 적힌 깨알 같은 설명글이 한몫했다. '마민카 정식은 매일 다른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가정식입니다. 특별하진 않아도 끼니마다 달라지는 어머니의 집밥처럼 그날그날 재료에 따라 바뀌는 셰프의 추천메뉴를 만나보세요.' 라고 쓰여있는 정성 어린 글귀가 그녀의 마음을 붙들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해국이 고심해서 준비했을 오늘의 메뉴가 무엇인지. 정갈한 글씨를 쓰는 남자의 정갈한 밥상은 어떤 그림일지. 빨리 보고싶어졌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해낼 주인공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주문을 받고 돌아선 해국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있다. 손님인 수빈에게는 상냥한 말투로 "네네"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후 여섯 시를 넘기기 전에 간신히 마수를 하게 된 것에 안도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땅이 꺼져라 통곡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국은 드러낼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숨긴 채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몇 분이나 흘렀을까. 이내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에 수빈의 달팽이관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툭탁탁. 타닥타그닥.  


도마와 칼과 자잘한 식기들이 정답게 부딪히는 소리가 커다란 공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파장은 수빈의 잠든 기억까지 불러냈다. 부지불식간에 깨어난 과거의 단면을 실눈으로 들여다보는 수빈. 그녀에게도 그런 저녁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퇴근길마다 단골 마트에 들르곤 했다. 양손 가득 무겁게 장을 봐다가 부랴부랴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 그가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쌀을 씻고 밥을 안쳤던 분주한 손의 기억.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멸치다시물을 우려내는 동안, 감자와 호박은 깍둑썰기를 해서 준비하고 버섯에 두부도 가지런히 썰어두곤 했다. 먹기 좋게 자른 차돌박이까지 한 줌 집어넣고 보글보글하게 된장찌개를 끓이던 저녁. 수빈에게도 그런 저녁이 있었다.


"응, 여보세요?"


어학원 수업을 마친 단비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 맞아. 그 골목에 한식당이 생겼더라고. 찾아올 수 있겠어?"


때마침 걸려온 단비의 전화가, 과거의 수렁 속에 빠져있는 수빈을 건져올렸다. 수빈에게 단비는 곱씹을수록 놀랍고 기막힌 인연이다. 석달 전 그날, 그날은 인천공항에서 프라하로 날아오르던 날이었다. 10월의 창공은 아름다웠지만 슬펐고 맑았지만 스산했다. 기내에는 꼬리가 긴 팬데믹의 영향으로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수빈과 단비는 나란히 옆자리에 배정되었다. 그럴 경우, 어떤 승객들은 승무원에게 요청해서 자리를 이동하기도 하는데, 수빈과 단비는 둘 중 누구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인연의 그렇게 시작됐다. 암스테르담에서 경유 편으로 갈아타기 전까지, 무려 11시간가량을 붙어 있었던 사이. 한날한시에 이국땅을 밟은 사이. 말하자면 그런 사이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한 차례 어색한 목례만 주고받았을 뿐 그 이상의 관계가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의례적인 눈인사로 돌아선 두 사람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어? 여기는 어떻게?", "여기서 묵으시는 거예요? 제 숙소도 여기거든요~"라는 말로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수빈에게 있어 단비는 타국에서 맺은, 처음이자 유일한 친분이다. 사람을 피해 떠나온 수빈이 다시 누군가를 가까이에 둔다는 건 어렵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단비에게는 곁을 내어주고 싶었다.   


"알았어, 길 미끄러우니까 뛰지 말고 천천히 와."


수빈은 왼손에 들린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차분히 공간을 살피는 중이다. 편안한 호흡으로 가게의 면면을 그러담는다. 카운터 안쪽에 놓인 피치색 포인세티아 화분과 화장실 입구에 걸어둔 계피향 방향제에도 눈도장을 찍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각을 잡은 테이블과 의자들. 수수한 듯 멋스러운 조명과 카운터 옆 선반에 진열된 북유럽풍의 빈티지 그릇들이 해국의 깔끔한 성정과 세심한 감각을 말해주는 곳, 마민카 식당. 이 모든 비주얼에 방점을 찍는 건 지금 이 순간 흐르고 있는 음악이다.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의 OST곡으로도 쓰였던 케렌 앤(Keren Ann)의 <Not Going Anywhere>. 보컬 특유의 속삭이는 듯 쓸쓸한 목소리가 프라하 올드타운 뒷골목에 자리한 신생 공간을, 감미롭게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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