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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Mar 01. 2023

#5. 왜 빨간 지붕일까

소설 연재/  빨간 지붕에 숨어

마민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한 수빈과 단비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트램을 탈 수도 있지만 소화도 시킬 겸 오붓하게 걷기로 했다. 거리에는 일찌감치 밤이 내려앉았다. 짙은 어둠이 검은 이불처럼 온 도시를 덮었고, 기온도 현저히 내려갔다. 수빈이 카렐교를 걸었던 낮 시간대와 견주면 못해도 3~4는 족히 떨어졌을 것이다.  


"언니, 안 춥겠어? 그냥 트램 탈까?"

"아니야. 얘기하면서 걸으면 금방인데 뭐."


단비에게서 느껴지는 온기의 힘일까 아니면 해국이 지어준 따뜻한 음식 덕분일까. 밤이 되면서 거리는 더욱 냉혹해졌지만 수빈은 더 이상 떨지 않는다. 애초에 추위 따위는 대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정말 움츠러들게 만드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체감온도를 좌우하는 건 날씨가 아니야. 얄팍한 사람의 기분인 거야.' 수빈이 이런 공상에 빠져있는 동안, 단비는 왼손에 거머쥔 스마트폰을 슬쩍 내려다본다. 오후 6시 47분. 액정에 뜬 숫자를 확인하고는 측면에 있는 버튼을 가볍게 한번 톡 눌러서 잠가놓는다. 화면이 꺼진 전화기는 다시 단비의 외투 속으로 들어갔다. 누빔으로 된 코랄블루색 숏패딩은 단비가 즐겨 입는 겨울아이템이다.


“언니도 그래?"

“뭐가?”

“유럽은 어딜 가나 노란 조명을 많이 쓰잖아. 자꾸 봐서 그런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 가볍게 날리는 노랑 말고 채도가 낮아서 살짝 붉은빛이 도는 아주 샛노란 가로등... 저기 있다! 저렇게 확실한 노란빛이 좋아. 저 안에 있으면 그 아무리 차가운 밤이라도 포근하게 느껴지거든.”


말없이 들으며 고개만 주억거리던 수빈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런데 말이야.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응? 필요라니?"

"밤의 성질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어둡고 차가운 거. 캄캄하고 시린 거. 억지로 빛을 들이대서 밝힌다는 게... 그게 다 인간들이 좋자고, 편하자고 그러는 건데. 밤의 정령도 그걸 원할까 해서."

"뭐? 무슨 정령? 호홀... 언니는 말이야... 감성적인 거야, 시니컬한 거야? 헷갈리니까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

"잠깐! 나 촉 왔어!! 이 센티멘탈한 무드는 뭐랄까... 요즘 나 몰래 연애해?”

"야! 백단비!"

"아님 말고~ 흐흣."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으며 쉴 새 없이 재잘대다가 소녀들처럼 깔깔거리는 수빈과 단비. 둘의 투샷이 생판 모르는 남들 눈에도 사랑스러운지, 마주 걸어오던 노부부가 흐뭇하게 눈인사를 건넨다.


"인자하신 분들 같아. 참 보기 좋은 부부다."


따뜻한 밤색 실로 뜬 털모자에 짙은 먹색 장갑까지 커플로 맞춘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수빈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빨간 지붕의 마술이 아닐까?"


단비가 엉뚱한 말로 수빈의 관심을 돌려 본다.  


"웬 마술?"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아? 저기 저 빨간 지붕들 말이야. 저렇게 동화 같은 집에서 살면 아무리 궁합이 사나운 부부라고 해도 금슬이 좋아질 것 같잖아."


두 사람의 아파트가 있는 구시가지에는 빨간 지붕의 집들이 즐비하다. 모양은 대부분 뾰족한 고깔형태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통일된 느낌이, 볼수록 신비하다. 지금은 밤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아침이 밝아오면 그 진가를 오롯이 드러낼 것이다.


"으이그. 막 갖다 붙이기는."

"막, 이라니! 나름 신중하게 고찰해서 하는 말이라고요."

"그러시군요. 그럼 우리,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볼까?"

"좋아. 얼마든지."

"여기 지붕 색깔 말이야. 다른 색도 많은데... 왜 빨간색일까?"

"엇. 나 그거 어디서 봤는데! 아... 뭐였더라?"


프라하의 지붕색이 빨간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라테라이트(laterite)라는 흙을 구우면 붉은색이 나온다고, 수빈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홍토로 진흙을 만들어서 지붕의 형태를 잡고 *테라코타,라는 기법으로 구우면 유럽을 상징하는 빨간 지붕이 된다고. 그렇게 쓰여있었다. 웹 서핑 중에 보았다고 하기에는 정보의 윤곽이 비교적 또렷하다. 미루어 짐작건대 글쓰기 플랫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 수빈은 포털사이트보다 '브런치스토리'라는 글쓰기 앱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개중에는 유럽생활을 수기로 올리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아마도 ‘지구 한 바퀴 세계여행’이라는 해외 글 카테고리에서 보았으리라.



"홍토를 써서 그렇대. 근데 그건 옛말이고 요즘은 건축 기법이 좋아져서 붉은 흙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거든? 근데 왜 변화를 주지 않는 걸까?"

"음. 그거야 뭐... 빨간 지붕이 없는 프라하는... 이상하니까?"


단비의 말이 맞다. 모르긴 몰라도 그건 기술 너머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라고, 수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있을 테고, 도시의 상징성과 같은 측면에서도 빨간 지붕의 역할은 실로 대단하니까. 물론 프라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빨간 지붕'하면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떠올릴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이는 독일의 밤베르크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유럽 전역이 붉은 물결로 뒤덮여있다. 지중해 연안의 남쪽나라부터 발트해를 끼는 북쪽나라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하지만 수빈에게 있어 '빨간 지붕의 도시'는 오직 여기, 프라하뿐이다.


"벌써 다 왔네?! 언니랑 얘기하면서 걸으니까 금방이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데 우리집에서 맥주 한 캔 어때?"

"크하~ 맥주라~ 몹시 구미가 당기지만, 다음에 하자. 나 오늘 너무 떨었나 봐."

"흐음. 할 수 없지... 그럼 얼른 들어가서 따숩게 주무셔요~"

"고마워요, 아가씨~ 너도 일찍 자. 내일도 수업 있잖아."

"응, 그럴게. 굿 나잇! 마이 빈~"

"또 까분다~"

"헤헷. 먼저 들어갑니당."


단비는 202호, 수빈은 502호에 산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한 지붕을 덮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사는 모양은 같을 수가 없다. 단비라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 방마다 불을 환하게 켜놓고 신나는 음악부터 틀어버릴 테지만. 수빈은 어둠을 건너 소파로 간다. 캄캄한 거실에서 고장 난 장난감처럼 털썩 주저앉아있다 보면 익숙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오는데. 일부러 맡으려 하지 않아도 집이 가진 특유의 향기가 스멀스멀 말을 걸어온다. 묵은 공기와 생활 소음 그리고 손때 묻은 세간은 그녀의 반려사물이다. 수빈은 집안에 있는 모든 유무형의 사물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눈다.  


'너희들도 종일 답답하긴 했겠다.'


마음 같아서는 꼼짝도 하기 싫지만 그런 게으름도 순간이다. 기어이 몸을 일으켜 창을 연다. 수빈이 집을 비운 사이, 내내 갇혀있던 묵은 공기들이 밤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아? 저기 저 빨간 지붕들 말이야. 저렇게 동화 같은 집에서 살면 아무리 궁합이 사나운 부부라고 해도 금슬이 좋아질 것 같잖아."


집에 오는 길에 단비가 했던 말이다. 케케한 집안 공기들은 바람 따라 모두 가버렸는데 어째서 이 구절은 떠나지도 않고 여태 수빈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걸까. 동화 같은 집. 부부의 금슬...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수빈은 여전히 가정법을 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시작했더라면. 조금만 더 인내했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그와의 이별을 막을 수 있었을까. 밤은 내면의 어둠까지 불러내는 재주가 있다. 밤과 어둠, 밤과 침묵, 밤과 성찰, 밤과 두려움... 수빈은 밤에 길들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진다거나 편안하다거나 그런 경지까지 이르진 못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한없는 낯섦에 몸서리를 친다. 밤이 주는 한결같은 공포에 몸이 떨린다. 그렇다고 매일밤마다 애꿎은 단비를 귀찮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를 환기시킬 무언가가 절실하기에. 수빈은 다짐한다.


'오늘밤에는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겠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야.'


우선, 소파 옆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스테인리스 스탠드의 스위치를 켠다. 탁자 위에 올려둔 노트북의 전원도 꾹 눌렀다. 아담한 거실에 동그랗게 드리워진 빛은 주방까지 넓게 퍼졌다. 은은한 빛의 줄기를 따라 열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냉장고 문을 연 수빈은 어젯밤에 마시다가 넣어둔 와인을 한 병 꺼낸다. 유리병 표면에 붙은 코팅종이에는 'FRANKOVA MODRA'라는 글씨와 함께 붉은 단풍잎 그림이 붙어있다. 블라우프란키쉬(Frankovka)라는 품종의 포도로 만든 슬로바키아산 레드와인인데 흔히 '단풍 와인'으로 불린다. 조그맣게 '2018'이라는 숫자가 적힌 걸로 보아 그 해 가을에 담은 듯하다.


“와인맛은 잘 모르지만 목 넘김이 불편하지 않고 뒷맛이 깔끔해."

 

와인숍에서 단비에게 했던 말이다. 2주 전이었고 금요일 오후였다. 단비는 프랑스산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골랐고, 수빈은 언제나처럼 단풍 와인을 선택했다. 그때 데려온 술을 어제부터 마시고 있다. 투명한 와인잔에 촤르르하게 붉은 물결이 담긴다. 잔의 3분의 1. 그 경계를 찰랑찰랑하게 채워서 노트북이 켜진 거실 탁자 옆에 가져다 놓았다. 한 모금 씩 입에 넣고 천천히 목을 적시는 동안에 시간은 몇 초나 흘렀을까. 빈 모니터를 넋 놓고 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어보는데.


안녕하세요, 작가님!
'K-스토리'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서재에 담길 소중한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작가, 축하, 소중한 글, 기대…

수빈 앞으로 날아든 한 통의 편지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이질적인 단어들이 질서정연하게 박혀있다. 물론 자의로 한 일이다. 작가 신청은 어디까지나 수빈의 자발적인 시도였다. 제 손으로 직접 글쓰기 플랫폼에 접속했다. 글을 쓰게 해달라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스스로 문을 두드렸다. 글쓰기와 수빈. 글쓰기와 이방인. 글쓰기와 이혼녀라... 혹자는 글을 쓴다고 하면 채우고 싶어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빈은 정확히 반대다. 비우고 싶어서 쓰려는 것이다. 가벼워지고 싶어서. 후련해지고 싶어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글로 풀어내면,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나 쏟아내면, 그러면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이었다. 당연히 거절당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의 결과가 찾아온 것이다.  


'합격이라니...'


왜일까. 수빈은 이런 순간에도 주저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잘됐다는 마음보다는 잘한 일일까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바랐던 일이 괜한 일로 바뀌는 괴이한 순간이다. 설령 마음이 그렇게 변덕을 부린다 해도 눈앞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것을 던진 건 수빈 자신이니까. 아무튼 작가.


오늘 부로 수빈은, 온라인 창작 플랫폼의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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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코타는 '점토(terra)를 구운(cotta)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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