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상식을 허물다
체코에서 살게 됐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실제로 이 나라는 술값이 물값보다 착하다. 마트에서 파는 캔맥주 가격도 거의 공짜 수준인데, 한 잔에 3천 원도 안 하는 생맥주는 마실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술값도 아니요, 감탄을 자아내는 맥주 맛도 아니다. 술의 천국인 체코가 내게 적지 않은 문화충격을 안겨준 건 술집 한 켠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놀.이.터였다.
그날 내가 마주한 그것은 어설프게 장난감 몇 개 가져다 놓은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고운 모래밭에 그네와 미끄럼틀까지 갖춘 '진짜 놀이터'였다.
상식적으로 술집은 어른들의 놀이터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공간의 상식을 과감히 깨뜨렸다.
"세상에! 어른들 술집에
애들 놀이터가 말이 돼?"
누군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체코에서는 말이 된다.
놀이터의 혁명을
목격한 그날
여느 때보다 조금 분주한 토요일 오후였다. 남편의 회사 동료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모임 장소는 이곳 오스트라바에서 2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카르비나의 어느 호프집이라고 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같이 가자는 남편의 말에 그러겠다고 동의는 했지만 그런 곳에 애를 데려가도 되는 건지 순간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어디 맡길 데도 없는 형편이니 고민해봐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와 나는 술집이 아니라 그 어디라도 꼭 붙어 다녀야 하는 운명공동체니까.
남편의 뒤를 쫓아 허겁지겁 약속 장소로 들어서는데 아이가 심봤다는 표정으로 돌고래 소리를 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세 살 아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 설상가상 ‘놀이터’가 있었다. 실로 이런 곳에 미끄럼틀이? 그네가? 모래밭이 있다고? 맙소사.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날 우리가 찾은 그 맥주집은 실내 반, 야외 반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 야외 공간 맨 끄트머리에 아이들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꼬마 손님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나무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네와 미끄럼틀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게다가 미끄럼틀은 한 종류가 아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유아들이 탈 수 있는 소형 미끄럼틀과 큰 애들을 위한 대형 미끄럼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편, 테이블에 앉은 어른들은 맥주를 홀짝거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아이들이 잘 놀고 있는지 힐끗거리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어른도 아이도 각자의 놀이터에서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분위기만 봐서는 여느 음식점과 다를 게 없는데 자리마다 맥주잔이 놓여있는 걸 보면 영락없는 술집이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술집에 어린애를 데려가는 부모는 우리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아직 초보 엄마라 이렇다 할 교육관은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술처럼 몸에 해로운 건 최대한 멀리하게끔 하는 게 옳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여기 부모들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다 보여준다. 술이든 뭐든 아이가 못 보게 뒤로 숨기는 대신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부모가 감추는 게 없으니 더 이상 궁금해할 것도 없다. 이게 유럽의 교육방식인 걸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만난 놀이터 하나가 내 좁은 식견에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오다니, 스승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던 누군가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이었다.
니가 왜
고속도로에서 나와?!
체코에 와서 놀이터 때문에 놀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최초의 놀이터는 고속도로에서 만났다. 프라하에서 우리집까지 차로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이마저도 휴게소 한번 들르지 않고 곧장 내달렸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처럼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밥도 먹여야 하고, 무엇보다 중간중간에 놀이터도 들러줘야 하기 때문에 못해도 대여섯 시간은 잡아야 한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이 나라 고속도로에는 휴게소마다 놀이터가 있다. 편의 상 휴게소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주유소다. 주유소에 편의점 수준의 휴게공간과 화장실이 있는데 그 건물 뒤로 돌아가 보면 어김없이 놀이터가 짠~하고 우리를 반겨준다.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내 주유소에선 볼 수 없는 놀이터가 고속도로만 들어서면 가는 곳마다 보기 좋게 마련돼 있다. 덕분에 장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주리를 트는 아이를 달랠 겸,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주유소 놀이터를 찾는다. 그러느라 네 시간 거리가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까지 늘어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딱히 급할 것도 없다. 성격 급한 내가 이런 여유를 갖게 된 것도 아이들의 행복을 중요시 여기는 ‘놀이터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