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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낳아 오면 되겠네

둘째 출산에 관한 개똥철학

by 조수필


"그래? 체코로 간다고? 잘됐다~

거기 가서 하나 더 낳아 오면 되겠네"



하나 더.

내게 이 말을 건넨 사람들은 최대한 가벼운 어조를 띠려 했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하나쯤 더 낳는 건데 뭐, 라는 의미였을까. 밖에서 그런 말을 듣고 온 날에는 온갖 상념으로 머리가 묵직했다. 마치 해야 할 숙제를 미루고 있는 게으른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하나 더 낳으면요?

그럼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나요?"






요즘도 나는 심중에 있는 그 말 때문에 수시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니까 내가 왜 둘째 생각이 없냐면...'으로 시작되는 구실 찾기의 연속이다. 어떻게든 당위성을 찾아내려 마음을 어지럽히곤 하는데 그러다가 잠시 멈칫한다.

거꾸로, 나도 누군가에게 숙제 같은 말을 준 적은 없는지. 내가 무심코 뱉어낸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이는 없었는지.


"하나 더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이런 말을 방패로 삼는 나 조차도 은연중에 그런 얘기를 늘어놓을 때가 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하나 더 낳아도 되겠다'라든가 '능력도 좋은데 하나 더 낳지, 왜' 하면서 상대를 불편하게 했다. 나도 하지 못하는 걸 남에게 권했으니 듣는 입장에선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설령, 그럴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기분이 언짢았다면 그건 조언일까, 비수일까.




외동인 아빠와
오남매 장녀인 엄마



남편과 나의 성장 배경은 정말 판이하게 달랐다. 남편은 무녀독남 외아들인데 나는 무려 오남매의 장녀를 맡고 있다. 형제 없이 외롭게 자란 그는 내가 동생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 거짓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요즘 같이 심플한 세상에 형제가 많아서 좋다고? 식구가 많아서 부담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형제자매가 많아서 마음에 든다니. 그 말이 진짜일 리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 웬걸. 이 엉뚱한 남자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모조리 지운 것도 모자라, 내 덕에 동생들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나보다 눈물이 많은 편이라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는 남편. 울보 신랑답게 처남과 처제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챙겨주면 어김없이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다복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북적북적한 대식구의 맏딸인 것도 남편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외아들인 것도.. 모두 우리의 뜻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적인 영역이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슬하의 2세는? 이 부분은 전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의지로 결정된다. 그렇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자 결혼 전부터 이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여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 봐도 명쾌한 해답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 대화의 분명한 교집합이 무어냐 묻는다면, 둘 다 아이라면 사족을 못 쓸 만큼 예뻐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에라 모르겠다~ 예쁘니까 하나 더 낳을까?!

글쎄, 둘 중 하나라도 화끈한 성격이었다면 그런 사고(?)를 쳤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벌이기엔 우리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내일모레 불혹이 되는 우리 부부에겐 셋 정도 키운다 싶을 만큼 존재감을 확실히 뽐내는 3세 아들이 있다.


만약, 첫 아이가 딸이었다면?

그럼 둘째를 갖기가 좀 수월했을까?

그런 가정을 해 봐도 여전히 자신은 없다. 적지 않은 나이와 넉넉지 못한 경제력도 걸림돌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너무 애틋하다


앞으로 두 해를 넘기면 사십 줄에 접어든다. 소위 말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이쯤에서 나는 심오한 고민에 빠진다. 내가 걸어가야 할 아줌마의 길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럼 이제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애나 키우면 되는 건가? 그렇게 평생을 바쳤는데 내 전부라 믿었던 자식들이 홀연히 떠나가 버리면?


적어도 그런 인생은 살고 싶지가 않다. 아이를 낳아보니 둘째 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포기하고 오롯이 엄마로만 사는 건? 그게 정녕 내가 바라는 삶인가? 새 생명을 잉태하고 대한민국 출산율에 기여하는 것도 나름대로 유의미한 업적이 될 테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너무 애틋하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분명히 있긴 있을 텐데, 난 아직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의 꿈을 아이에게 투영할 마음도 없다.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아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무기력한 엄마는 아니길 빈다. 기왕이면 나이에 굴하지 않고 뭐든 도전하는 여성상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엄마! 나는 왜 동생이 없어?"라는 말을 듣게 되는 날도 오겠지. 그럼 난 무슨 답을 준비해야 할까. 그럴듯한 핑계를 찾다가 하릴없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해도 바뀌는 건 없으리라. 어차피 인생이란.. 선택과 집중이 빚어낸 불공평의 드라마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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