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은 붉은 노을처럼, 붉은 꽃무릇처럼.
정말 가을이 올까? 하며 간절히 기다리던 가을이 왔다. 기후 변화 탓에, 매번 찾아오던 계절 손님이 이번엔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지난 계절, 그토록 기다리던 봄은 짧게 지나가 버렸고, 여름은 놀라울 만큼 뜨겁고 길었다. 명절 연휴 내내 이어진 비 끝에, 마침내 오늘. 기다리던 그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딱 좋은 '가을의 맛'. 그 맛으로 가을이 왔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오직 자연이 선물해 주는 맛이다.
높아진 하늘은 청량한 푸른빛과 하얀 구름으로 선명한 색을 칠했다. 아파트 사잇길 가로수들은 적당히 불어주는 바람에 손뼉 치며 인사한다.
살짝 드리운 햇살과 신선한 공기는 깊은숨을 쉬게 한다. 저절로 눈을 감고 부드러운 음률에 맞춰 살랑살랑 춤추고 싶은 마음으로 미소를 가득 띠며 사뿐사뿐 걸었다.
시간의 레시피 속에서 자연은 늘 다른 맛을 낸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선물처럼 느껴진다.
바람, 공기, 햇살은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계절마다 다른 레시피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의 결, 공기의 향, 햇살의 온도, 하늘의 빛깔이 저마다 "이게 나야" 하고 말하는 듯 다르게 느껴진다.
식물을 키우며 그 사실을 더 자주 실감한다. 환기를 할 때마다 창가의 잎사귀들이 반갑다는 듯 흔들린다. 그 모습은 마치 산책을 나갈 때 즐겁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다.
같은 실내 공기 속에서도 식물들은 각자의 계절을 산다.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고, 겨울에만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조차 잎의 색과 결이 달라진다.
같은 공간, 같은 흙, 같은 물을 주는데도 저마다의 시간에 계절을 받아들인다.
'이건 분명 계절의 레시피 때문 일거야.'
창문을 열면, 식물들이 자연이 보낸 손님을 반갑게 흔들며 맞이하듯, 봄길, 가을길을 걷다 보면 때마다 다른 감각이 느껴지고, 생각은 꽃처럼 피어난다. 다른 빛깔로 추억이 떠오를 때면, 잠시 멈춰 서서 그날을 향유한다. 그렇게 나도 식물들처럼, 계절이 올 때마다 살랑거린다.
사람들은 인생을 계절에 비교하기도 한다. 봄을 시작과 가능성의 시절, 여름을 성장과 열정의 시절, 가을을 성찰과 성숙의 시절, 겨울을 멈춤과 회복의 시절이라고 말이다.
또 '인생의 파도'라는 표현도 있다. 인생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듯, 끊임없이 요동치는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들뜬 봄의 시절, 치열한 여름의 시절이 있었으며, 말할 수 없이 추운 겨울의 시간도 있었다. 시절마다 파도는 밀려와 내 삶을 흔들었고, 물러나면 평온이 찾아왔다.
평온을 누리다가도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면 버둥거리며 견뎌야 했다. 이제는 언제 어떤 푯말을 들고 닥쳐올지 모를 파도를 인정하며, 대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파도가 두렵지 않다고는 못하겠다. 그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삶의 파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쯤이면 인생의 가을이라고 한다. 가을이 결실과 수확의 시기라지만,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부의 결실은 나에게 없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날들에 만족하며,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는 자각과 깨달음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됐다.
앞만 보고 달리던 젊은 날과는 달리, 지금의 나를 채우고, 변화하는 세상을 받아들이며,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내가 기특하다. 사람들은 가을을 말할 때 떨어지는 빛바랜 잎을 떠올리지만, 나는 청량한 초저녁에 붉게 물든 노을을 떠올린다.
나에게 가을의 첫 신호를 알려주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다. 마치 누군가 절화를 잔디 속에 잔뜩 심어 놓은 듯,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연한 초록 줄기 위에 붉은 꽃이 무리 지어 핀다.
매번 그 갑작스러움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단단한 가지도 없이 연약한 줄기에 붉은 꽃을 피운다. 양지가 아닌 곳에서도 피어나고, 가을답지 않게 화려하다. 화려하면서도 단정하고, 무리 지어 있으면서도 고요하다.
인생의 가을이 이렇게 좋은 이유는 아마도 나만의 '꽃무릇'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일까.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만 맛볼 수 있는 청량한 바람처럼, 수많은 시절을 지나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온도가 있다.
계절은 반복되고 파도는 여전히 너울거리며 흐르지만, 모두가 빛이 바래졌다고 여길 때, 나는 내 안의 빛을 조금 더 붉게 태운다. 그것이 나만의 가을 레시피다.
인생도 익어가는 깊은 맛의 계절.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