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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샌달 Aug 24. 2024

유학 포기하고 돌아왔니?

방학에 귀국하면 친구들을 만나러 한 번씩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갔다.

한국 고등학생은 방학에도 보충수업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하니까.


쉬는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애들이랑 인사하고 나면 바로 교장 선생님과 티타임.

'1회 입학생'과 '친근함으로 승부 보려는 교장선생님'의 콜라보랄까?

중국생활이 어떤지, 잘 적응했는지 등등 교장선생님 질문에 열심히 답하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다음으로는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들께 돌아가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런 생활은 학부모석에 앉아 친구들의 졸업식을 참가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써놓으니 내가 뭐 매우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람 같은데, 난 아주 조용한 아이였다.

우리 학교 1회 입학생에 대한 선생님들의 관심과 애정 덕분에 이런 상황이 자동으로 연출되는 거다.


1회 입학생 한정으로 학교 선생님 모두가 전교생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다. (몇 반인지까지)

복도에서 "거기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콕 집어 이름을 불러서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없다.

1회 입학생에 대한 선생님들의 각별한 애정은 고3이 되었을 때 기대로 바뀌었다.

SKY 대학을 몇 명이나 가느냐에 따라 학교 이미지가 결정되는 거니까.


중국에 간 이후 처음 귀국해서 학교에 찾아갔을 때, 고 1 때 담임선생님도 만났다.

엄마와 함께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 어차피 실패할 거 자퇴하지 말고 그냥 한번 갔다 와보라고 한 그 선생님.


나를 보자마자 "유학 포기하고 돌아왔니?"

내가 유학하는 걸 집에서 계속 지원해 줄 수 있는지 금전적인 문제도 언급하며 포기할 거면 일찍 하는 게 낫다고 무시하듯 말씀하시는 모습에 '변하지 않으셨구나!' 다른 의미로 한결같은 선생님.

원래도 워낙 특이한 선생님이라 별 타격은 없었지만, 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작은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웨이브가 자잘하게 많이 들어간 긴 머리카락을 항상 반묶음을 해서 뽕을 있는 대로 넣었고, 눈화장과 입술색이 매번 연두색, 꽃분홍, 보라  독특한 색이었다.

국사 선생님이셨는데, 애들이 지루해하면 남편과의 첫날밤 이야기나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 아팠던 썰 등 왜 듣고 있어야 하나 의문을 갖게 하는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차라리 수업하는 게 더 낫다고 느끼게 하려는 큰 그림이셨을까?


매월 시험이 있는 고등학교 생활.

(모의고사-중간고사-모의고사-기말고사)

모의고사는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모든 시험에서 한 등수라도 떨어지면 종례 후에 의자 위에 올라가게 하고 종아리를 때렸다.

(참고로 담임 선생님의 회초리는 쇠로 만든 가느다란 막대기.)

종례 후라고 함은 다른 반 애들이 집에 같이 가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시간!

여름에는 뒷모습만 봐도 다른 반 애들이 우리 반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대는 맞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국사 과목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응?)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그 선생님 입에서 처음으로 "잘 지냈냐?"는 첫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대답 없이 선생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짧은 한 마디가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에.


친척 어른 몇 분도 어쩌다 명절에 만나면 보자마자 첫마디가 "유학 포기하고 돌아온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왔니?"라는 질문은 못하는 거야?

최소한 오랜만이라는 말이라도.

아니, 그냥 "왔니?"라고만 해도 괜찮지 않나?


왜 다들 내가 유학을 실패할 거라고 하지?

왜 내가 실패하길 바라는 걸까?


성인이 된 지금,

어른들은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봤는데, 글쎄?

자신이나 자기 자녀들이 유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였을까?

본인들이 우리 집보다 훨씬 부유하고 넉넉한데,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표현한 걸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걸까? 삶이 재미없어서?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그런 어른들을 바라보며 참 안타까웠다.

예쁜 말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 말과 생각은 결국 내가 듣고 나에게로 돌아가는 건데...


어떻게든 남을 깎아내리고 싶은 부정적인 어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며

"유학 포기하고 돌아왔냐"는 말에

"잘 지내다가 왔다"고 대답하면서

더 열심히 살자고, 끝까지 성실하게 잘 지내고 돌아오겠다고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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