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샌달 Jun 22. 2024

보고 싶은 나의 첫 선생님

李老师와의 첫 만남, 첫 수업

나의 첫 중국어는 정년퇴직한 소학교(小学=초등학교) 선생님께 배웠다.


퉁퉁하고 덩치 큰, 눈매가 살아있는 할머니.

평소 총기(聰氣) 가득한 눈과 장군 같은 포스로 계시지만, 내 앞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순수한 표정으로 귀여움을 한껏 뿜어내시는 우리 선생님.


룸메언니가 먼저 그 선생님께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언니를 따라 선생님 댁으로 인사드리러 갔다. 인사보다는 면접에 가까운 자리였지. 날 보고 가르칠지 말지 결정하기로 한 첫 만남이었으니까.

아는 말이라고는 성조 없는 '니하오'와 '씨에씨에'. 눈빛으로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가서 인사하고 앉았는데 바로 수락하셨다.


첫 수업날. (아직 학교 가기 전)

한번 가본 길은 찾기 때문에 룸메언니에게 걱정 말라며 학교를 보내고 혼자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주 넉넉한 시간을 잡고서.


45분 정도 동네를 열심히 돌았는데 선생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는 15~20분 거리)

답답했던 나는 길 가던 사람을 잡고 공부한 몇 개의 중국어 중에 "请问 [qǐng wèn](말씀 좀 여쭙겠습니다)"을 말하고 손가락으로 선생님 집 단원 '1-2-1'을 열심히 표현한 후, "어떻게(손을 들고 어깨를 들썩하며) 가나요(열심히 걸어가는 시늉을 하며)?"라고 한국말로 물어봤다. 그 사람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지나갔다. 당황스러웠을 텐데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한 게 고마웠다.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집으로 얼른 돌아가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받은 선생님에게 영어도, 중국어도 못하는 나는 최대한 아는 걸 끄집어내서 말했다. 

"老师 [lǎo shī](선생님), I can't find you."


왠지 선생님이 마중 나오신다고 하는 것 같아서 전화를 끊고 다시 밖으로 나가 눈밭을 열심히 달렸다. 

동네를 몇 바퀴 돈 건지 영하 25도 날씨에 땀이 날 정도로. 

하지만 또 못 찾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상황. 그때 갑자기 생각난 중국어 단어들! 

역시 사람은 위기에 닥치면 강해지는 건가?


"찐티엔 부취↘ 밍티엔 취↗? (今天不去,明天去?(오늘 안 가고, 내일 가요?))"

아는 단어를 최대한 동원해 전달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 "응응(嗯嗯)!!"


이렇게 해결되고 그다음 날엔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가서 선생님을 만나 찐한 포옹부터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내 걱정이 되셔서 한참 걸어 나오셨었다고 한다. 

손녀 오기 기다리다가 마중 나오는 할머니 마음이셨던 것 같아. 

늘 나와 룸메언니를 손녀처럼 대해주셨으니까.


수업은 중국 소학교 어문(語文) 교과서(=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로, 1학년부터 시작!

어문책과 연필, 지우개를 챙기고, 선생님 발음을 녹음하기 위해 녹음과 재생 기능이 있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와 공테이프를 챙기면 중국어 공부 가방 완성.


그렇게 한국어를 모르는 중국인 할머니와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 고등학생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전 05화 학교 운동장에 화장실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