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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샌달 Nov 09. 2024

자유롭고 바쁜 열아홉 살 (1)

보통 10대의 마지막을 '고3'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부담과 압박을 이겨내며 보낸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겪는 그 시간 동안 동급생이 친구가 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듯 공부하며 고생하는 틈틈이 많은 추억도 쌓이니까.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열아홉 살을 맞이할 줄 알았었다.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 내 열아홉은 자유로움이 바탕에 깔린 경험의 시간이었다.

학교를 가는 시간 외에는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에 가고, 무언가를 했다.


# 연초: 객식구 생김, 세 번째 이사


이전 글에서 말했다시피 객식구가 생겼다.

살고 있던 집의 계약 만료로 이사할 집을 알아봐 둔 상태에서 언니가 갑자기 온 거였다.

보름 정도 기존 집에서 지내다가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언니의 장보기가 더 심란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 혼자 한 것과 다름없는 이사.


내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언니에게

자신의 짐만 정리하라고 한 뒤에 부지런히 나머지 짐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쌌다.


이사 전날 밤,

좀 더 늘어난 짐을 옮길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삼손 같은 힘을 달라는 기도도 해보고, 내가 적어둔 이삿짐 목록을 보며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며 잠에 들었다.


이사 당일, 예약한 트럭이 도착하고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지금 사는 집은 4층, 이사 갈 집은 3층.

나이가 많고 힘이 생각보다 세지 않아서 괜히 방해만 될 것 같다는 언니에게는 이사 후 정리를 맡기기로 하고 열심히 짐을 날랐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이니까.

그리고 삼손만큼은 아니지만 힘이 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통돌이 세탁기는 도저히 나 혼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트럭 기사에게 밥 한 끼 정도의 금액을 추가로 내고 함께 옮겼다.)


중국에 와서 벌써 세 번째 이사, 네 번째 집.

이번 집 역시 방 둘, 거실 하나, 집주인이 조선족.

집주인 중 할아버지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이 집의 특징.

할머니가 중국어와 조선말을 못 했다.

두 분이 어떻게 소통하시는지 참 신기하더라.


살림살이를 제 자리에 배치한 후 정리하고 청소하며 새로운 집에 적응 시작!

객식구 언니도 새로운 집이 맘에 든 눈치였다.

몇 달을 함께 지내며 잘 회복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으로 대학을 때까지 집에서 살았다.


# 5월, 노동절(劳动节, 5월 1일) 주간


중국은 노동절과 국경절(国庆节, 10월 1일)에 일주일을 쉰다.

학생은 5일 정도 쉬고 주말에 학교를 가서 수업일수를 채운다.


그 주간에 중국 전 지역에서 유학하는 크리스천 청년들을 위한 캠프가 열린다.

교회 언니·오빠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열리는 그 캠프에 참가했다.

(원래는 스무 살부터 참가할 수 있지만, 열아홉 살은 예외로 받아준다.)


당시 중국에는 아직 고속열차(高铁)가 없었고 '特快'라고 부르는 열차가 제일 빨랐다.

* T열차(特快[tè kuài]): 중국 내 주요 도시, 일부 주요 역만 정차하는 장거리 열차(성(省)의 수도, 부성 급(副省级) 시(市), 일부 주요 도시만 정차).

좌석은 네 종류로 가격 차이가 꽤 있었다.

* 딱딱한 의자(硬座[yìng zuò]): 꼿꼿하게 앉는 쿠션감이 전혀 없는 좌석
* 푹신한 의자(软座[ruǎn zuò]): 쿠션감이 아주 살짝 느껴지는 정도의 좌석
* 딱딱한 침대(硬卧[yìng wò]): 아주 얇은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칸으로, 상, 중, 하 층으로 되어 있다. 층별 가격 상이. '하' 층 가격이 가장 높다. 기차 한 량에 마주 보고 있는 6개의 침대가 있는 칸들이 쭉 늘어져 있는 구조
* 푹신한 침대(软卧[ruǎn wò]): 쿠션감이 살짝 느껴지는 침대칸. 상, 하 층으로 되어 있고, 복도와 분리된 벽이 있거나 문까지 있는 기차도 있어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베이징까지는 10시간 정도 걸렸기 때문에 T열차의 딱딱한 침대칸을 타고 가기로 결정.

자리는 나이순으로 배정해 주셔서 나는 '상' 층.

'상' 층은 사다리를 오른 후, 머리부터 쭉 미끄러져 들어가야 한다.

침대에 들어가는 순간 그냥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기차 천장이 코 앞에 있는 답답한 자리. (짐칸과 같은 높이의 층) 

정말 자고 싶어질 때 올라가야 하는 곳.

중국에서 처음으로 다른 지역을 가보는 거라서, 어렸으니까 힘든 것도 다 좋았던 것 같다.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시작된 베이징 일정이었지만)


중국 전 지역에서 모인 대학생과 청년들이 무작위로 편성된 조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는 캠프.

여러 명사의 강의도 듣고 교제도 나누며 즐겁게 지냈다.

베이징 각 교회에서 온 스태프들(역시 대학생과 청년으로 구성)의 봉사 덕분에 편하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정말 많은 한국인이 다양한 지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지낸다는 걸 그때 확실히 알게 됐다.

힘든 유학 생활과 각자의 고충들을 나누며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기도 했고.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함께 고생한 사람들과는 아무래도 빨리 친해지게 되는 것 같다.

고3을 함께 보낸 동급생이 평생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나 역시 같이 유학 생활을 하며 고생한 친구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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