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샌달 Nov 23. 2024

집 안에 내린 폭우

아직 추위가 머무는 3월의 마지막 주,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학교를 다녀와서 DVD로 드라마를 보며 쉬는 시간을 가지고,

저녁도 잘 챙겨서 먹고, 뜨끈하게 샤워도 했다.

다음날 등교 준비를 마친 후에 잘 정리해 둔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서 잠에 취해있는 내 귀에 점점 거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밖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나 보다 하며 졸음을 가득 묻히고 창밖을 살펴봤는데

거리가 너무나 고요하고 평안했다.

소리 없이 어둠만 내려앉은 평온한 새벽 풍경.


뭐지? 

그럼 어디서 나는 소리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는 순간, 내 머리 위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벽에 이게 무슨 일이람?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까치발을 들고 찰방찰방 소리를 내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며 가장 먼저 전기제품부터 방으로 피신시킨 후,

자잘한 물건들을 열심히 나르는 중에 소파는 흠뻑 젖은 채로 덩그러니.


바쁜 와중에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1, 2층 사람들이 우리 집(3층)이 사건의 원인이라 오해하고 쳐들어왔다.

아저씨들이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우리 집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이 새벽에 갑자기 우리 집 거실이 물바다가 된 것도 아주 당황스럽고 황당한데,

내 허락도 없이 아저씨들이 맘대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했다는 게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복잡한 감정과 기분.


우리 집이 아닌 걸 확인한 그들은 험한 말을 뱉으며 4층으로 올라갔다.

알고 보니 윗집이 수도를 잠그지 않은 채 외출하고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였다.


신기한 건 우리 집만 방에 물이 새지 않았다!

뽀송하고 따뜻하게 자다가 빗소리에 잠에서 깬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

1, 2층 사람들은 방까지 물난리가 나서 피해가 훨씬 컸던 상황.

젖은 까치집 머리와 젖은 잠옷 차림의 성난 아저씨들 모습이 이해는 갔지만...(막무가내로 집 안에 들어오는 건 아니지 않나?)


집주인한테 상황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후,

밤새 열심히 온 집안의 물기를 닦아내다가 등교 시간이 되어 학교에 갔다.

온갖 감정이 엉킨 상태로 어찌어찌 하루를 보내고

하교하자마자 집을 체크하러 집주인이 왔다.

 

그리고 물난리에 대한 피해보상은 집주인이 받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피해를 본 건 나와 내 물건이지, 집주인은 그냥 거실 마룻바닥이랑 싸구려 소파만 피해를 본 건데...


내 냉장고, TV, DVD 플레이어, 카세트 등 이런저런 물건 피해와 

밤새 잠도 못 자고 뒷수습한 고생은 누가 다 보상해 주나요?


다행히 카세트 빼고는 고장 나지 않고 작동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해.

잠을 못 자니까 머리가 덜 돌아가잖아.

그때는 그냥 내 방 침대가 뽀송하다는 것이, 전기제품이 물에 젖었는데 사고가 안 나고 고장도 안 났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외국인이라, 학생이니까, 그저 '애'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생활 마지막 집에서 시간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 28화 자유롭고 바쁜 열아홉 살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