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많이 길었지만, 중국에서 커트하기엔 미덥지 않아 그냥 하나로 묶고 다녔는데,
감당이 안 되기 시작했다.
답답하기도 하고,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머리를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원래도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 교회 언니가 중국 미용실 도전을 한다고 하길래 나도 따라갔다.
실패를 줄이기 위해 한인타운에 있는 미용실로.
그래도 우리 동네보다는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나를 담당하는 미용사가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파마를 추천했다.
언니도 파마를 하기로 하고.
만약 이상해도 묶으면 되니까, 컬이 있으면 올림머리가 더 잘 되니까 괜찮을 거로 생각하고 도전!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서 확실하게 추가 비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빗고 파마약을 바르는 것까지는 무난했다.
그런데...
최소한의 머리카락을 잡아 빙빙 꼰 다음, 가장 가는 로드(rod)로 말기 시작하면서부터 잘못됐음을 알았다.
뿌리까지 빙빙 꼬인 머리를 로드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마는 모습에 '이게 맞나...?'
나 숱 많은데 괜찮을까? 그리고 언제 다 하려고?
이미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지.
미용사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두 명이 붙어 땀을 뻘뻘 흘리며 반 정도 말았을 때, 준비대에 잔뜩 쌓여있던 로드가 소진됐다.
(아마 미용사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한 것 같기도)
그렇게 로드 두 세트가 내 머리에 있으니 너무 무거웠다.
자기들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리며 무거운 머리를 받칠 것을 가져왔다.
불안감이 가득한 시간이 지나고 중화까지 끝낸 후 마주한 내 머리.
가볍게 물기를 털고 갑자기 다 됐다고 했다.
말리면 안 된다고, 자연스럽게 마르면 예뻐질 거라고.
전혀 믿을 수 없었지만 이미 한 걸 어떡해?
이상하면 그냥 묶어야지 뭐.
(가격이 저렴한 이유가 있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머리가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두 시간.
자연 바람에 마르면서 머리카락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머리가 반 정도 말랐는데, 다 마르면 어떤 모습일지 예상이 됐다.
뿌리까지 알차게 컬이 들어간 머리는 풀고 있어도, 묶고 있어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갑자기 흑인 재즈가수 헤어스타일의 고3 학생이 된 나.
그들은 잘 어울리고 멋지잖아! 나한테는 안 어울린다고.
졸업사진(증명사진) 찍어야 하는데...
(졸업사진 찍고 나서 도전하지 그랬니? (과거의 나에게))
중국 증명사진은 배경이 하늘색이라 안 그래도 이상한데, 내 머리까지 이상하네?
하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그렇게 그 모습은 증명사진으로 남았다.
(친구가 재밌다고 한 장 가져갔었는데, 지금은 안 가지고 있겠지...?)
아, 언니의 파마 결과는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언니는 머리숱이 보통이었고, 나보다 한 단계 굵은 로드로 말았다.
그리고 언니의 생머리는 파마약을 이겼다.
머리카락만 잔뜩 상하고 파마가 세게 안 나와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컬이 나왔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언니의 머리는 파마가 거의 다 풀려있었다.
그게 부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파마가 금방 풀려서 돈 아깝다고 생각했을 텐데.
방학이 되자마자 미용실부터 갔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미용실.
미용사 아저씨가 내 머리를 보더니 "아이고! 왜 그랬어?"
머리가 많이 상해서 완벽 복구는 힘들다고 하시면서 판 스트레이트 시술을 했다.
뿌리의 꼬불거림은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어느 정도 수습은 됐지만, 꼬불거리는 뿌리로 인해 한동안 흑인 재즈가수 머리로 지내야 했다.
그렇게 스무 살을 맞이했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한 학기 늦은 9월이 새 학기라서 여전히 난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다시는 중국에서 미용실을 가지도, 도전하지도 않았다.
내게 어울리는 무난한 헤어스타일이 최고라는 걸 알았다.
(변화가 필요할 때 가장 만만한 게 헤어스타일 변화라 또 머리를 건드릴 수 있겠지만)
대학에 다닐 때부터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많아졌다.
하지만 무조건 미용실은 한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