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갇혀버린 정체성
어렸을 적 우리는 하루 종일 학교에 갇혀 있고, 중요 이벤트라고 해봐야 중간고사, 기말고사 정도였다. 게다가 목표도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를 위해 달리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중간고사, 기말고사 패턴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아보는데 익숙해졌고, 시험 한번, 점수 하나에 집착하게 되고 그 점수가 나를 대변한다고 착각한다.
나는 AI 코딩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수강생들이 내가 낸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열심히 준비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강의 시작할 때만해도 서툰 느낌이 많이 났었는데, 시험을 보면서 거침없이 코딩하는 모습에 이 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어렸을때부터, 수백 어쩌면 수천번의 크고 작은 시험을 보며 자라왔고, 오늘 봤던 그 시험도 그 거대한 흐름의 하나일 것이다.
나 역시 크고 작은 시험을 치러온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시험이란 대체 무엇일까. 수강생들이 열심히 내가 낸 문제를 풀어서 백점을 받았다고해서, 그들을 인공지능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전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전에서 인공지능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시험에서 백점을 받았을 지언정 실무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시험이라는게 아무리 실전성을 반영하려고해도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시험은 본질적으로 확실한 정답이 있는 세계이고, 실전은 내가 처한 상황과 일의 맥락에 따라 정답이 계속 변하는 세계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시험을 실전의 축소판이라고 착각한다.
시험은 추상회된 정적 세계라고 생각한다. 시험은 제한된 시간, 정해진 조건, 명확한 정답 안에서 문제를 푸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실전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수족관 안에 담은 것과 마찬가지다. 시험에 비해 실전은 훨씬 복작하고, 불확실하며, 다른 사람과의 협업이 중요하며, 상황이 계속 변하는 동적인 세계이다. 그러니 시험을 통해 실력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의 수영 실력을 어항에서만 평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험이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다. 시험이 비록 실전과 다르긴하지만, 논리 구조, 집중력, 이해도 등 여러 능력을 어느정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전의 아주 일부일 뿐, 시험 결과에 본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투영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험 결과가 잘 나왔다고 우쭐댄다거나, 반대로 못나왔다고해서 좌절하거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여전히 시험 점수에 집착할까?
우선 시험은 피드백이 빠르고, 명확한 위계 질서를 만든다. 시험은 보고 나면 며칠 이내로 점수를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누가 더 잘했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복잡한 비교 말고, 시험 점수와 같은 단순한 숫자로 명확한 질서를 믿고 싶어한다. 반면 실전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평가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느리고 불확실한 실전보다 빠르고 확실한 시험에 중독된다.
시험은 정답이 있어 안심이 되고, 틀과 기준이 주어진다. 반면 실전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다. 문제도 스스로 정의해야하고, 평가 기준도 정해져있지 않고 유동적이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불확실성을 적은 시스템에 대한 심리적 의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험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어떻게 보면 시험보는게 마음이 편한 것이다.
사람들이 시험을 선호하는 것은 사회적인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이 시험을 통해 사람들을 줄 세우길 원한다. 기업, 학교, 정부는 개인을 빠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 입장인데, 시험은 정량화가 가능하므로 효율적으로 사람을 걸러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누구는 1등, 누구는 꼴등. 복잡한 기준 대신 개인에게 쉽게 라벨을 붙이는 것이다. 수능 점수, 출신 학교, 학점, 토익 점수 등으로 말이다.
시험 점수나 각종 랭킹과 같은 숫자들은 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한다. 수능 성적, 학점, SNS 팔로워 수, 논문 편수, 대학 랭킹, 군사력 랭킹 등 이 모든 숫자들은 복잡한 현실을 요약하기 위한 언어적 도구일 뿐 진짜 세계가 아니다. 군사력 랭킹 2위 러시아가 20위 우크라이나 상대로 예상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15위 이스라엘이 16위 이란을 압도하는 양상은 숫자의 허상을 보여준다. 숫자로 구성된 표면적 질서가 본질을 가리고, 숫자로 만든 프레임이 현실을 왜곡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숫자에 매몰된 정체성을 찾아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