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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감상

노벨상과 100미터 달리기

애니메이션 100미터(100M) 감상평

by 장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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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은 노벨사 수상자가 발표되는 시기다. 매년 그랬지만 올해는 옆나라 일본의 30번째 노벨상이 발표되면서 더욱 씁쓸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올해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다.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건 인재가 의대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100미터를 보면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았다. 이 작품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인물들 각자의 철학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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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만 누구보다 빠르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돼 - 토가시


주인공 토가시는 어렸을 때, 항상 1등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는데, 어느정도냐면 개인시간 내서 친구에게 코미야에게 달리기를 가르쳐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커다란 재능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뒤쳐짐에 따라 여유를 잃고, 마침내 성인이 되어서는 모든걸 놓아버린 느낌까지 들었다. 토가시는 어렸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발이 빠르다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토가시는 "빠른 나"가 아닌 "빠르기 때문에 가치 있는 나"로 자신을 정의한다. 달리기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1등이라는 위치에서 오는 타인의 인정과 우월감이 자아의 기반이 된 것이다. 코미야에게 달리기를 가르쳐줄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토가시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형들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외부 조건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신체의 변화, 부상, 더 뛰어난 선수들의 등장 등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결국 "1등을 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나"로 정체성을 규정하면 기록에서 뒤쳐지는 순간 자아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 자신에게 "빠르지 않은 토가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이다. 달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결과에 의해 자신의 존재의미가 결정된다.




이는 현실에서도 비슷하다. 시험 점수가 좋은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점수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토가시의 어린시절은 이런 모습들을 보는듯 하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의하면 90점 받은 아이는 90점짜리 인간이고 50점 받은 아이는 50점짜리 인간이다. 그래서 토가시와 마찬가지로 1등하던 애들이 2등, 3등으로 밀리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면 자신만의 기준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자기를 재단하는 습성이 생긴다. 명문대에 가지 못한 나, 대기업에 가지 못한 나처럼 말이다.


더 잔인한 사실은 사회에 나오면 그 점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진짜 내재적 동기로 달리는 사람은 꼴찌를 해도 웃을 수 있다. 달리기 자체가 좋으니까,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좋으니까. 그러나 토가시에 달리기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목적 달성에 실패하면 그 의미를 잃는다. 이 이야기는 개인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5살도 되기 전에 시작되는 줄세우기, 서열회, 상대평가 구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등수에 자아를 의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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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록만이 제 목표입니다 - 코미야


나는 처음에 토가시가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캐릭터이고 코미야는 순수 즐거움을 중시하는 캐릭터일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미야의 달리는 동기는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었다. 그는 달리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달릴 때만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술 마실 때만 고통을 잊을 수 있어서 술을 마시는 것 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게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동기다. 그에게 목적지는 없다. 그저 여기만 아니면 된다.




앞서 토가시는 비록 왜곡됬긴 했지만 1등이라는 명확한 목표라도 있었다. 그러나 코미야에게 달리기는 그저 도피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부상당한 그는 도피처를 잃고 방황한다. 그러다가 자이츠의 조언을 받고 리미트가 해제되는데 이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열정이 폭발한다. 그는 그 때부터 위대한 기록을 세우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기록을 위해 달린다" 이 얼마나 공허한 목표인가. 기록은 과정의 결과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보통 리미트 해제라고 하면 재능이 개화되는 느낌이 드는데, 코미야의 리미트 해제는 마치 캐릭터가 폭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예전에 대학교 1학년 때 1점대의 처참한 학점을 자랑했다. 그러다가 군대 다녀오고 졸업 평점 4.0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졸업하는 날 학점 4.01로 졸업했는데, 내 대학 생활을 돌아봤을 때 남는건 허무함 뿐이었다. 마치 1등이 되어서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코미야와 같이 말이다. 나는 4.0 이라는 숫자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살아 있는게 아니라 마치 목표를 향해 달리는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살아간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월천만원 수익", "한강 뷰 아파트"와 같은 외적 지표들을 추구하면서 달성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위대한 기록을 남기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코미야처럼 말이다. 기록에 집착하면 '나 자신'은 사라진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성장'을 외치고 달린다. 그리고 그 달림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할 뿐이다. 사회에서는 기록 갱신은 곧 성공이라는 공식을 사람들에게 세뇌 시킨다. 학교에서는 시험 점수, 회사에서는 실적, 사회에서는 돈과 지위. 모든게 수치화 되고 우리는 그 숫자를 올리는데 인생을 쏟아붓는다.




토가시는 달릴 이유를 잃은 인간이고, 코미야는 멈출 이유를 잃은 인간이다. 토가시는 과거에 묶인 인간이고, 코미야는 미래에 쫓기는 인간이다. 진정한 달리기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행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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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잃을 가능성으로 가득차있기에 생명의 묘미가 있다 - 자이츠


자이츠는 일본 육상의 최정상을 달리는 선수로 토가시와 코미야의 목표이자 멘토 역할로 등장한다. 자이츠는 토가시나 코미야와 같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욕망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1등을 차지하지만 웃지 않는다. 그는 육상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력으로 달려서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고 말하고, 부상을 입어 입스에 걸린 코미야에게는 기록을 위해서라면 육체따위는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를 기록을 내기 위한 도구화 시켜버린다.




이것은 마치 사회에서 "쉬면 도태된다", "남들보다 빨리 성장해야한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맞는 말처럼 보이는 이 말은 사실 인간을 자기 착취의 노예로 만든다. 자이츠는 이러한 구조의 정점에 선 인간이다. 그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잃었다. 자이츠는 성공을 신격화한 현대사회에서의 신과 같은 포지션이다.




자이츠의 조언 "살아남으려면 전력으로 달려라"는 어떨까.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노력의 미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전력으로 달리는 인간은 절대 오래 달릴 수 없다. 전력으로 달리는 것은 단기적 성취를 내야하는 상황에서는 통하지만 장기적으로 삶의 지속성 관점으로 봤을때는 좋은 전략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전력으로 달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 번아웃으로 무너진다.




유튜브에서 성공한 기업기나 부자들은 말한다. "나는 잠을 3시간 밖에 안잤다.", "연봉 1억 찍으려면 건강 따위 내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러한 조언들은 성공한 결과만 보여주고 그들 뒤에 있는 수만명의 실패자들의 시체를 가려버리는 생존자 편향을 보여준다. 자이츠의 조언은 일시적으로 코미야의 재능을 개화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파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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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을 하면, 즐거운 때로는 못돌아가 - 니가미


자이츠가 성공, 토가시는 좌절, 코미야는 집착을 상징한다면 니가미는 실패 이후의 인간을 나타낸다. 니가미는 어렸을 때 유망주로 잘나갔던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니가미는 한때 달리기 신동으로 토가시의 롤모델로 등장했을만큼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로인한 압박감과 부상으로 한번에 무너진다. 결국 니가미는 자신을 감추고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켜버린다. 아마 그는 "유망주로서의 자신"을 사랑했던게 아닐까.




현실에서도 니가미와 같은 아이들이 많다.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유망주를 만들어 성적이 좋은 아이, 달리기가 빠른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와 같이 그들에게 "너는 특별하다"라는 칭호를 부여하지만 사실 이건 "너는 실패하면 안된다"라는 저주에 가깝다. 실제로 그들이 한 번이라도 꺾이면, 그저 평범해진게 아니라 망가진 사람 취급한다. 우리 사회는 회복의 서사를 바라지 않는다.




유망주라는 딱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유망주라는 칭호를 받는 순간 "지금의 나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평가 받는다. 실제로 중학생 시절의 니가미를 보는 것이 아닌, 앞으로 위대한 선수가 될 예정인 니가미를 본 것이다. 니가미가 등부상을 당한 것은 그저 운이 안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에게 등부상은 그저 트리거였을 뿐이고 진짜 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등부상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터질 일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등부상은 단순히 재능있는 아이가 불운한 부상으로 실패했다는 관점으로 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견딜수 없는 압박을 받던 아이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볼 수도 있다. 니가미의 존재는 작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실패하고 히키코모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100미터 트랙이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면서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용기내어 집 밖으로 나왔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기록을 너머 스스로 달리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니가미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이기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보통 스포츠 만화에서 '복귀'는 영광스러운 회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니가미의 복귀는 다르다. 그는 다시 트랙에 설 때부터 이미 알고 있다. 예전처럼 빨라질수는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린다. 그는 더이상 달리기로 무언가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달린다. 실제로 그는 복귀한 후에는 몇등을 하던 신경쓰지 않고 순수 달리기 자체에 집중한다. 그는 토가시처럼 타인과 경쟁하지 않는다. 그는 코미야처럼 기록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이츠처럼 자기 착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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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 달리기 = 사회 시스템


작중에서 100미터 트랙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경쟁 시스템을 의미한다. 스타팅 라인은 교육제도, 기록 측정기는 평가 시스템, 관중석은 사회적 시선, 심판은 규율에 해당한다. 달리기 기록은 효율성이나 생산성을 의미하며 순위는 사회적 가치를 의미한다. 누가 더 빠르고, 성과를 냈는지가 곧 누가 더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결정해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 대부분의 인간은 모두 트랙 위에서 달리는 선수가 되어버린다. 각자의 번호표를 달고, 코스를 벗어나면 실격 처리 된다.




이 구조의 문제점은 획일적 기준을 강요한다. 100미터 달리기는 속도만 측정한다. 폼의 아름다움이나 달리는 즐거움, 개인의 성장은 무시된다. 10년간의 훈련과정은 보지 않는다. 부상과의 싸움이나 정신적 성장은 보지 않는다. 오직 숫자만 보고 판단한다. 학교나 회사도 마찬가지다. 교육 시스템에서는 시험점수나 석차에 따라 장학금이 부여되고, 회사에서는 실적, 평가 등급에 따라 승진이나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측정 가능한 것만 가치 있고, 순위가 높아야 의미있고, 상위권만 보상받는다.




시스템은 오직 한가지 서사만 허용한다. 시스템이 말하는 성공은 1등, 좋은 학교, 대기업, 높은 연봉이며, 다른 성공은 인정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것,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 자기 답게 사는것과 같은 것들은 성공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시스템은 이런 삶을 그저 "평범한 삶"으로 깎아내린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은 오직 한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실패자가 되는 구조다. 시스템이 말하는 성공인 명문대, 대기업, 억대연봉은 소수에게만 해당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짧은데, 육체적 전성기가 지나면 선수생활도 끝이 난다. 그러나 시스템은 팽생 그 정체성을 요구한다. "전 국가대표 홍길동"이라는 딱지가 평생 따라 다닌다. 자기 자신이 현재가 아닌 과거로 정의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 회사를 20년 다니다가 퇴직하면 "전 00기업 부장"으로만 남는다. 작중에서 유일하게 달리기가 좋아서 달리는 니가미조차 여전히 육상 트랙 위에 있다. 대회는 여전히 순위를 매기고, 기록은 계속해서 측정된다. 사회는 여전히 그를 전직 유망주로 본다.




이 시스템의 가장 무서운 점은 달리기를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착취 시스템의 완성이다. 작중에서 토가시, 코미야, 자이츠는 한번도 멈춘적이 없기에 왜 달리는지 모른다. 그들은 멈추면 무너질까봐 두려워서 관성으로 달린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면 좋은 대학 간다고 말하고, 회사는 성과를 내면 상준다고 말한다. 이는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성과에 걸게 만드는 구조이다. 그래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달리고, 비교하고, 상처받는다. 감시자가 없어도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 시스템은 어렸을때부터 세뇌시키기 때문에 간파하기 무척 어렵다. 아이가 비판적 사고를 하기 전부터 이미 뼈속까지 내면화 시킨다. 어렸을 때 운동회를 기억하는가. 겉으로는 화합과 건강 증진을 명분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잔인한 서열화 의식에 가깝다. 모든 학부모가 지켜봄으로써 도망칠수 없고, 공개적으로 순위를 매긴다. 달리기 결과에 따라 등수가 새겨진 물리적 표식 아래에 서고, 등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된다. 사진을 남김으로서 영구적으로 기록을 남긴다. 이 모든 것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꼴등으로 들어온 아이는 숨을 헐떡이고 들어온다. 1등부터 4등까지는 이미 다른 아이들이 차지하고 있고 홀로 천천히 걸어가 5등 깃발 아래에 서야한다. 그리고 그 앞에는 추억을 남기고자하는 어머니의 카메라가 보인다. 승자는 보상받고 패자는 수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어린나이부터 온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어렸을 때부터 빨리 달리면 칭찬받고 상받았기 때문에 의심할 틈이 없었다. 달리는 법은 배우지만 멈추는 법은 배운적이 없다. 학교는 달리라고 가르치지만 왜 달리는 지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설사 그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고나서 달리기라는 제도에 이끌려온 자신을 깨닫게 되더라도 멈추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멈춘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을 비판하기 보다 그 안에서 더 효율적으로 달리는 법을 배운다.




시스템의 문제를 간파했다고 해도 벗어나는건 또 다른 문제로 어렵다. 시스템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스템을 따르지 않으면 실제로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렵고, 좋은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로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낙인 받을지도 모른다. 생존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중에서 자이츠가 살아남으려면 전력으로 달려라라고 말한 것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시스템 안에서는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더 무서운건 다른 길이 잘 안보인다는 것이다. "100미터 달리기 말고 뭐하지?", "공부 안하면 뭐하지?", "회사 안다니면 어떻게 살지?" 시스템은 한 가지 길만 제시하므로 사람들은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다가 도중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다시 돌아가서 하지그래?", "박사 학위는 있어야지", "아깝다", "국내에서라도 하는건 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스템 밖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스템의 무서운 점은 알아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입시 지옥을 겪은 부모가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학원에 보내고, 야근으로 성공한 상사가 부하에게 야근을 강요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나때는 더 힘들었어"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 때는 더 힘들었어"라고 말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시스템은 문제를 개인화 시킨다. 니가미가 무너진건 니가미가 약해서이고, 토가시가 무너진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코미야가 1등을 했음에도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코미야 개인의 문제이다. 시스템은 책임이 없고 항상 개인탓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쉬었음 청년"이 문제되고 있는데, 이게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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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라는 트랙


노벨상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노벨과학상은 표면적으로는 위대한 연구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계의 트랙이다. 과학자들을 한줄로 세워서 누가 빨랐는지를 보여주는 무대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건 노벨사 수상자의 대부분은 트랙을 위해 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 노벨상 수상자의 경우 코미야나 자이츠가 아니라 니가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즉, 기록을 목표로 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거나 순수한 궁금증으로 달린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트랙 자체를 목표로 하는 사회로 노벨상을 받아야한다, 논문을 많이 써야 한다, SCI급 저널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와 같이 기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의 과학자 대부분은 작중에서 좋은 기록을 내야 살아남는다고 말한 자이츠와 같은 방식으로 달리고 있다.




여기서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발생한다. 일본에는 장인 문화가 있는데 이는 과학계에도 적용된다. 연구를 '기술의 예술'로 여기는 것이다. 즉, 자기 분야에 깊이 몰입하면서 사회의 인정과는 거리를 둔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 대부분이 10년 넘게 아무도 보지 않는 연구실에서 묵묵히 연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작중으로 치면 니가미에 가까운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의 과학은 "연구비 따내기" 경쟁 시스템과 같다. 과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에 가깝고 연구는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이며 논문은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증거에 불과하다. 어느새 연구의 목적이 사라지고 달리기를 위한 달리기만 남는다. 일본의 연구 문화는 달리기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화이고 한국의 연구 문화는 기록을 통해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적 압박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독자적인 연구보다는 선진국이 뭐하는지 지켜보고 유행하는 주제 따라가기 바쁘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단기적 성과에만 집중하는데, 이는 과학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100미터와 같은 일본 만화는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고, 오래 준비하고 연재하기 때문에 완성도도 높으며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가진다. 반면, 한국의 웹툰, 웹소설 분야에는 스낵컬처라는 자조적 표현이 있는데, 스낵컬처의 본질은 즉각적인 쾌락이다. 웹툰은 조회수에 따라 연재 여부를 결정하고, 연구는 논문 수와 인용 횟수로 가치를 매긴다. 둘다 깊이보다는 속도, 사유보다는 반응 중심으로 돌아간다. 결국 과학과 예술 둘다 트랙위의 경기 종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니가미와 같은 과학자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시스템이 니가미와 같은 유형의 과학자들을 생존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은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신념하에 굴러가고 있다. 과학이 아니라 비즈니스에 가깝다. 그야말로 '스낵과학'이 아닐까.




노벨상은 아이러니하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면 받지 못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받을 수도 있다. 언젠가 뉴스 기사로 한국에서도 노벨 과학상을 배출하기 위해 노벨상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벨상은 부산물일 뿐, 목표가 아니다. 마치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행복해지기 실패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노벨상은 진리탐구의 결과로 오는거지 노리고 받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 수상자들을 보면 회사원이었는데 실험 실수로 새로운 발견을 했다던가, 회사가 연구 중단을 지시했지만 혼자 몰래 계속 연구하다가 노벨상을 받았다던가, 주변에서 시간낭비라고 비웃었지만 혼자 30년간 연구하다가 받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무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궁금해서, 재밌어서, 의미있다고 생각해서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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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더 빨리 달리려는 법만 배웠지,

왜 달리는지를 묻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노벨상이라는 트랙, 입시라는 트랙, 성공이라는 트랙 위에서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달리지만,

그 끝에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린 얼굴만 남는다.

진짜 위대함은 기록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언젠가 한국 사회가 100미터의 결승선을 넘기보다,

스스로의 발걸음에서 기쁨을 찾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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