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점 7점대 영화를 보는 이유

단순히 영화를 넘어 책, 과학에 이르기까지 대 iteration의 시대

by 장철원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봤다. 해당 작품들이 나온지는 거의 20년이 넘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 못보다가 이제서야 보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 작품들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들로 평가받는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 감독들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하며 보게 되었는데, 사실 기대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 감독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에서 모두 한 느낌이고 이후 작품들은 iteration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장르와 다른 비유로 더 친절하게 반복하는 느낌이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뛰어난 감독들이지만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모두 원작이 존재한다. 올드보이는 원작 만화 올드보이에서 뼈대를 가져왔고, 살인의 추억은 애초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므로 실화가 뼈대가 되는 셈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그들은 원작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지 않았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비틀어 표현했다. 기본적인 원작의 플롯만 가져오고 주제, 결말, 감정선까지 모두 재창조했다. 사실상 원작을 재료로 하긴했지만 원작을 불태워버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 느낌이다.



나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보다 한 단계 더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레벨에서는 원작이 없으며, 감독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든 경우이다. 에일리언의 리들리 스콧, 매드맥스의 조지밀러가 그렇다. 물론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들도 완전히 제로부터 만든것은 아니고 다양한 창작물에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진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만들었고, 이후 수십년간 수많은 다른 작품이 그 세계를 참고한다. 세계관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공간을 만들고 규칙을 발명하는 셈인 것이다.




영화를 많이 보다보니 많은 감독들은 원작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며 안전하게 재현하거나, 팬서비스 차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영화계 전체를 보면 이 단계만 넘어도 상위권은 되는 것 같은데, 내 기준에서는 이 단계를 넘는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의미에서 영화를 보면 볼 수록 아이러니하게 볼 영화가 없어지는 것 같다. 나는 영화감독은 분명 자신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내가 접한 많은 작품들은 그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한 듯 보였다. 물론 거기에는 산업구조나 자본의 압력 속에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전체 구조가 반복되고 장르 문법, 미장센, 등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 iteration이라는 생각이 들면 시간 대비 효율이 낮다고 생각해서 끝까지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건 영화계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iteration은 새로운 질문이 사라진 상태라는 점에서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나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출판쪽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 어렸을 때는 서점에 가면 읽을 책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점에 읽을 책이 없다고 느껴진다. 제목만봐도 대략 무슨 말을 할지 보이고, 목차를 보면 결론이 예상되며, 몇 페이지만 읽어도 iteration이라는게 느껴진다. 이는 종교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종교는 인류사에서 세계관, 윤리, 죽음의 의미 등을 제공하는 강력한 시스템인데, 스콧 벡 감독의 영화 헤레틱에서는 종교마저 iteration이라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종교가 서로 싸우는 듯 보이지만, 결국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른 언어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이다.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박사과정에 진학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영향이 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뉴턴의 고전역학간의 치열한 패러디임 싸움. 나는 박사과정에 진학하면 이런 개념싸움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몸담았던 분야에서는 이미 정상과학(normal science) 상태로 접어들었으며, 개념싸움은 이미 끝났고, 확립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기존 이론을 더욱 정밀하게 다듬고 발전시키는 상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술적으로 정리해서 논문을 쓰는 iteration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개념을 부수는 순간을 느끼고 싶어 박사과정에 진학했지만 내 분야에서는 이미 그 싸움이 예전에 끝났고 기존 체계를 정리하는 성격에 가까워보였다. 결국 나는 학교를 그만둔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평점 9점대의 소위 명작이라 불리우는 영화만 골라서 봤었다. 하지만 점차 새로운 질문을 찾기 힘들어 요즘에는 평점 7점대의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를 많이 본다. 평점 9점대는 누구나 좋아할만한 영화라는 뜻이지만 평점 7점대는 감독이 무언가 시도는 했는데 어긋났다거나 새로운 질문을 하긴했는데 미완성 상태라거나 아직 사고의 틈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는 실패작이라고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유일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을 비틀어주는 보석같은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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