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힘들게 일하고 어쩌다 하루 쉬는 주말
나는 티브이를 틀었다.
무엇을 보고 싶은지
보고 싶은 건 뭔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냥 어김없이 습관처럼 리모컨을 눌렀다.
보고 싶은 드라마를 찾고 있는 도중에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23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보고 싶은 방송을 보려면
본방사수를 하거나
재방송을 봐야 했던 시절.
주 5일은커녕
토요일 격주 근무도 없던 그때 그 시절.
평일과 같은 토요일 출근날이었다.
6시에 하는 연애 프로그램이
왜 그렇게 재미가 있던지
아침부터 퇴근까지 일하는 내내
티브이를 보고자 하루를 열심히 일했다.
바라던 퇴근을 하고
평소 오던 시간에 11번 버스만 제때 오면
프로그램 시작과 비슷하게 집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버스는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왜 이렇게 버스는 오지 않았는지
버스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둘 시계를 바라보며 인상은 굳어져 만 갔다.
지금처럼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려주는
버스 정류장 전광판이나,
스마트 앱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 택시를 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은
그런 건 상상도 못 할 때였다.
결국 버스는 평소에 오는 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차가 막히지 않고 빨리 간다면
뒷부분 조금은 볼 수 있다는 나만의 희망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날은 토요일 주말,
차가 너무나 많이 막혔다.
그리고 평소보다 1시간 반이나 늦게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착하자마자 티브이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누르고
티브이가 켜지지도 않았는데
나는 채널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이미 다 끝난 걸 알면서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예능 프로그램은 끝났고
결국 나는 본방사수를 할 수 없었다.
좋아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버스가 늦게 와 버려서 볼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났었고 허무했다.
그날 나는 그 허무함에
하루빨리 승용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 있었다면,
본 방송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라는
단순하고 1차원적인 생각을 했었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못 본다?
지금 2025년 대한민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서 보고
손바닥 만한 핸드폰으로
시간과 장소도 상관없이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수많은 걸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냥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는 그렇게 불편함이 많아서
목표도 많았던 거 같다.
늦게 온 버스 때문에
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못 봐서
승용차를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버스전광판을 만들고, 스마트 앱을 만들고
더욱 발전된 스마트 폰을 만든 건 아닐까?
나는 편리함 속에서
목표를 잃어가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불편해하는 것들이
다 해소가 된다면
우리는 살아 가는데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까?
괜스레 씁쓸한 마음에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러 티브이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