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찾아온 밤

아물지 않은 마음 # 행성 -43

by 이청목

국내 여행의 두 번째 날 오후

전주 여행의 시작은 기분이 좋았다.


달리는 차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 햇볕이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날씨는 쾌청했고, 도로도 한산했다.


초겨울의 풍경은

아직 가을의 색을 완전히 놓지 못한 듯,

단풍과 황량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차가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전주에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매주 일요일

전주에서 인천에 있는 교회까지 와서

함께 청년 생활을 하던 동생이었다.

내가 강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오랜만에 만나게 된 거라 더 반가웠다.


동생은 가장 먼저 덕진공원으로 안내했다.


초겨울의 덕진공원은

알록달록한 단풍이 절정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물감처럼 흩날렸다.


경기전 과 한옥마을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득했고,

그 활기 속에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오후 내내 전주에서 사는 동생과 함께하며

참 많이 웃었다.


사람이 주는 온기, 여유로운 시간,

도시가 주는 감성이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하루가 끝나고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는 순간,

따뜻한 공기가 날 감싸며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온돌 바닥의 열기는

얼른 누우라고 끌어당겼다.


따뜻한 온기를 이겨내고,

하루를 정리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덕진공원, 경기전, 한옥마을,

함께 웃었던 순간들,

따뜻했던 저녁 식사.

즐거웠던 시간을 적어나갔다.


하루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시렸다.


즐거운 하루였고 많이 웃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우울한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표현이 안 되는 고독한 마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동생들은

나의 과거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전에 사는 동생과

전주에서 사는 동생.


예전에 함께 시간을 쌓아온 사람들이기에

자연스럽게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이겼다고 믿었던 일들.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감정들.

더 이상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생각보다 깊숙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말하다 보니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마음의 조각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 과거 나의 지난 일들을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한 적이 없어서 몰랐다.


난 과거를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


그저 말할 상대가 없었고,

생각하지 않아서 몰랐던 것뿐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씁쓸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차리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앞으로는 더 많이 여행을 떠나야겠다.

혼자이거나 누군가와 함께이거나,

이렇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더 만들어야겠다.


감정은 생각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뿐이었다.


조금씩 꺼내 보고, 조금씩 말하고,

조금씩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연습을 하고

굳은살이 생겨야 한다는 걸 알았다.


오늘 전주의 밤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감정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독이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그 고독까지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불편하지 않았다.


나의 과거가 아직

완벽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모른 채 지나갔다면

회복이 더딜 수도 있었다.


알아차렸으니 이제 이겨내면 된다.


그러니

오늘도 행복에 한 걸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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