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죄책감

by 배윤민정

*

얼마 전에 뮤지컬 [펀 홈]을 보다가 날카로운 물건에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대사와 노래도 강렬했지만, 내 마음에 잭나이프처럼 날아와서 꽂힌 것은 주인공의 아빠 ‘브루스’가 특정한 순간에 취하는 자세였다. 스웨터와 면바지를 입은 여윈 체형의 남자가 약간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모습. 그 남자가 고물 상자 속에서 은으로 만든 주전자라든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천을 발견하는 순간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는 모습. 그리고 등을 굽히고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는 모습. 이것은 내 전 배우자인 D가 때때로 나에게 보여주던 몸짓들이었다.


이혼 절차를 마무리할 때 D와 나는 KB손해보험 고객센터로 갔다. 계약자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던 보험을 그의 이름으로 바꾸려는 목적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로비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가만히 있다 보니 ‘초음파 안경 닦기’라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흔히 안경원에서 안경사가 쓰는 모습을 봤던 물건인데 로비 한쪽에 놓여 있으니 신기했다. 나도 안경 닦아야지.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서 고여 있던 투명한 액체에 안경을 넣고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윙’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며 액체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당황해서 안경을 놓쳐버렸다. 그제야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코로나 시대에 이렇게 공공장소의 물건으로 안경을 닦으려고 하다니. 누가 자기 안경을 담갔을지 모르는 액체에 내 안경을 넣다니. 나는 액체 속에 푹 빠져버린 안경을 허겁지겁 건지며 자신을 비난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 가만히 있지도 못해.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물기가 뚝뚝 흐르는 안경을 대강 닦아서 안경집에 넣었다. 축축하게 젖는 안경집을 보니 갑자기 울고 싶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D가 유리문을 지나서 로비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일 오후 시간의 고객센터는 조용했다. 대기표를 뽑자마자 창구에 번호가 떴다. 보험사 직원은 차근차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처리해줬다. 계약자 이름을 변경하는 일, 이제까지 내 통장에서 자동이체되던 보험료를 D의 통장에서 이체되도록 바꾸는 일. 그는 작은 수첩에 보험료가 이체되는 날짜와 자신의 계좌번호를 적었다. 그가 애용하는 브랜드의 수첩에, 그가 좋아하는 파란색 펜으로. 그는 글씨를 잘 썼다.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고 글자의 획을 생략하고 휘갈겨 쓰는 내 필체와는 달랐다.

“여기서 그림 그려도 돼요?”

내가 살던 집에 그가 들어와서 막 동거를 시작하던 무렵, 그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물었다. 탁자 위에 스케치북과 색연필 상자를 펼쳐놓고서. 탁자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아이 같았다.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물어봐. 자기 귀여운 척 하려고 묻는 거지?”


그때 그의 모습을 보는 내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을 것이다. 그때. 그렇다, 그때. 나는 그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지켜줄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세상을 탐험할 수 있도록 해줄게. 어떤 나쁜 일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내가 주변을 감시할게. 고객센터 창구에서 수첩에 글씨를 쓰는 그를 보고 있으니 또다시 애정이 솟아올랐다. 아니, 그 감정은 애정이라기보다 애정의 꿈에 가까웠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햇빛 한 점 없는 길을 걸어갔다. 나는 도로에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워놓은 낮은 기둥에 쓰러지듯 몸을 앉히며 말했다.

“잠시만 앉았다 가.”

건물 안에서 눈물을 참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울면 나를 달래주는 대신 같이 울어버리는 사람이었기에 함부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온몸으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울상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

나는 보통 아침 6시부터 7시 사이에 꿈을 꾼다. 눈을 뜨면 침대 맡의 탁상시계가 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몸에는 꿈속에서 느낀 감정의 여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밟고 지나가서 살갗 여기저기에 발자국이 찍혀 있는 기분이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내 몸은 그저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햇빛이 들어오는 빈방을 보면서 자문한다. 이 아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매일 혼자 이상한 세상에 갔다 오는 것 같다.


며칠 전 꿈속에 D가 나왔다. 그는 무수한 계단으로 이루어진 산 중턱에 서서 나를 돌아봤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단 한편에 노숙인이 머물고 간 흔적처럼 녹슨 깡통과 넝마가 굴러다녔다. 나는 고개를 들고 손짓했다.

“얼른 가, 얼른 가.”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표정, 울상을 짓고.

“얼른 가. 얼른 가.”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깨어났다.


[펀 홈]의 무대에서 브루스 역할의 배우가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자세는 인물의 절망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동성애자인 동시에 정상가족의 남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은 브루스의 삶에 계속해서 불화를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한 번도 온전히 수용 받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자기 욕망을 드러낼 수 없다는 무력감은 결국 그를 자살로 몰아간다. 나는 뮤지컬을 보고 난 다음부터 종종 바닥을 보며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본다. 몸짓이 정서 상태의 반영이라면, D는 나와 함께 살던 시간에 브루스처럼 불행했던 걸까?


공연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단지 브루스의 모습에 D가 포개어져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은 이제까지 내가 D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원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브루스가 린넨 천과 은주전자를 들여다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 순간 익숙한 허기가 몰아쳤다. 바로 그 자세처럼 D가 나에게 고개를 기울이기를 바랐다. 몸을 숙이고 내 얼굴을 살펴보길 바랐다. 아빠가 딸에게 묻듯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이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아가야, 필요한 거 없어?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현실은 내 바람과 달랐다. 그는 집에 있을 때도 늘 바빴다. 요리, 설거지, 취미로 하는 번역, 온라인 게임, 맥주 마시기 등등. 나는 침대에 누워서 방문 밖에 있는 그를 소리쳐 부르곤 했다.

“나 목 말라. 물 좀 갖다 줘. 이리 와서 발 마사지 좀 해줘. 내 머리 쓰다듬어줘. 아니 아니, 그렇게 하지 말고 이마에서 머리카락의 경계 지점을 가볍게 쓰다듬어줘.”

그는 잠자코 내 말에 따라 움직였다. 돌이켜보면 내 요구가 그에게는 연인의 투정이라기보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올리다가 말했다.

“자기는 참 좋겠다. 내가 이렇게 해주니까. 그런데 나는…. 누가 나를 위해주지?”

“내가 위해주잖아.”

가볍게 대답하고 그가 가져온 물을 꿀꺽꿀꺽 마시는 나.


*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일여 년 동안 나는 D에게 자주 말했다.

“자기는 예전이랑 달라졌어. 옛날엔 항상 나한테 잘해줬잖아. 그런데 이제는 나한테 짜증만 내.”

그의 대답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자기는 내가 보호해야 하는 존재 같았어. 예민하고 병약해 보이고…. 만화 속에 나오는 소녀 같았어. 그래서 자기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까 아니더라고. 자기는 나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주체적인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내가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하지?

자기 말대로 우리가 동등하다면 내가 왜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해?

자기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 왜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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