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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윤민정 Oct 24. 2020

좋은 하루

어제는 M, J와 함께 한강 공원에 갔다. 팬데믹 시대에 한강 공원에 가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마스크를 벗거나 음식을 먹은 건 아니었다고 강조해서 변명해본다.


많은 양의 물을 보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강물에 일렁이는 무수한 삼각형 모양의 물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던 마음속의 소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강물을 보고 있으니 나도 저렇게 내 안에 흐르는 것들을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싶다거나, 특정한 반응을 얻고 싶다는 허기와 갈증에 시달릴 필요 없이.


J와 M이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올 동안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다. 오래 전에는 함께 있던 사람이 화장실에 간다거나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떠나면 늘 불안했다. 상대방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이렇게 기다리는 나를 조롱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가 사실은 모조리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는 결정적 순간의 목전에 와 있다는 불안. 물론 이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기에 누구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상대방이 다시 돌아오면 안도할 뿐.


M과 J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놀랍게도 내가 전혀 불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기뻤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고독하지만, 그렇다고 고독함 때문에 슬퍼지지는 않게끔 조금 이따가 친구들이 돌아온다는 믿음 속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시간. 만약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걱정이 되어서 찾아 나서지, 이 관계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생각에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만큼 성장한 자신이 대견했다.


J와 M이 돌아온 다음에 나는 두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전거 타는 법을 연습했다. J의 자전거 교육 지론은 ‘뒤에서 잡아주는 것보다 혼자 터득하는 편이 빠르다’는 것이었는데, 과연 그랬다. 두 사람의 설명에 맞춰서 몇 번 움직여보니까 금세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박수를 받으면서 자전거를 배우니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요즘 친구들이 나를 키우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못 하겠다고 했을 때 “(기대했지만 네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같은 반응이 아니라 “못 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듣는 경험. 어떤 일을 하기 전 긴장되거나 겁이 난다고 말했을 때 “내가 곁에 있을까?”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험. 그리고 누군가 나를 응원하고자 자신의 두려움을 참으며 손을 내미는 것을 아는 경험. 우편함에 예쁜 편지들이 잔뜩 꽂혀 있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다정한 편지가 나한테 도착할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서 봉투에 쓰인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는 기분.


해가 진 다음 우리 세 사람은 강둑에서 조금 높은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J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한강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이 있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M은 흔들리는 나무를 가리키며 보기 좋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날 아침 일기에서 흔들리는 나무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고 썼던 터라 그 말이 반가웠다. 야경을 보는 동안 이야기가 이리저리 흘러갔다. 한 해 사이에 얼마나 세상이 많이 바뀌었는지. 저마다 작년에는 무얼 했는지. 나는 딱 작년 이맘때, 지금은 헤어진 배우자와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실감이 났다. 나는 문득 놀라움에 사로잡혀서 말했다.

“우리가 일 년 전에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다 모르는 사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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