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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피터 Mar 24. 2021

동료 음악가를 떠나보내며

도덕경공부

얼마 전 동료 음악가 A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나이 서른 즈음이었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홍대의 작은 무대에 섰던 기억, 내가 기획했던 공연에 음악가로 참여해 주었던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해서 그의 죽음 또한 너무도 생생하게 피부 가까이로 다가왔다.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일이 참 쉽지 않다. 우리가 노동해서 만들어내는 작업물과 활동들이 재화로 쉽게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여러 사이드잡을 갖고 살아간다. 사이드잡이 누군가에게는 트렌디하고 힙한 부케의 느낌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예술가들의 그것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삶의 유지와 안정을 위한 기반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사이드 노동은 전문성과 지속가능성이 형성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동료 음악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종종 SNS에 육체노동, 카페알바와 같은 소위 임시/단기/비정규적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당당히 공유했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음악가로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여러 사이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활동의 비중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와 다르게, 그의 음악, 그의 예술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꿈을 꾸었던, 왕성하게 활동하며 살아가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말이다.


어디 예술가들의 삶뿐이겠는가.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합계출산율 또한 세계 최저수준(0.84명)을 기록하고 있다.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고, 이에 비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노동임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최근 삼성전자의 성과급 50%가 이슈화 되었지만, 모두가 꿈꾸기 마련인 대기업의 국내 고용률은 사실 1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부동산 신화는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지만, 평범한 우리의 소득으로는 매달 '생활'을 유지하기 조차 벅찬 것이 현실 이리라.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제 경쟁이 그나마 가능했던 사회를 넘어,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소수의 여유로운 삶을 위해 다수의 삶이 착취되고 있는, 새로운 계급/계층사회로 고착화되었는지도 모른다. 1999년 개봉한 SF영화 매트릭스에서 묘사했던 시스템을 위한 생명 착취의 모습들처럼 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기계에 의해 자원으로서 양육되고 있는 인간


노자는 도덕경 3장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와는 전혀 다른 가치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바로,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욕심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 과도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말이다.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현명한, 똑똑한, 뛰어난 것을 높이 여기지 않아야,

백성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난

욕심을 낼만한 것들을 드러내지 않아야,

백성들의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는다.


是以聖人之治, 시이성인지치

그래서 성인의 정치는


虛其心, 實其腹,  허기심, 실기복,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워주고,


弱其志,   强其骨. 약기지, 강기골.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대는 강하게 한다.

                                                                                                  

2010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한 음악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떠오른다. 그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음악활동으로 연봉 2,000만원을 벌고, 결혼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종종 말했지만, 결국 만루홈런의 역전을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연봉 2,000만원은 아득한 목표다.


노자가 말한 욕심이 없고 경쟁이 없는 사회가 어찌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 가능하겠는가. 어쩌면 그저 이상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겠다. 다만, 경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정했으면 좋겠다. 삶을 유지하는 것만큼은 그렇게 치열하고 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꿈을 꾸며 희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워,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오늘날, 어떤 이들은 본인의 부른 배를 더 채우기 위해 소시민을 착취하고, 공공/권력의 힘을 악용해 불법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덕경 3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사회를 향한 노자의 깊은 빡침이 생생히 전해지기 바라며.


使夫知者不敢爲也. 사부지자불감위야

저 지혜롭다 하는 놈들이

감히 무엇도 하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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